"셰셰" 못하면 취업 안 된다...베트남 덮친 중국어 열풍[동남아 돋보기]
<3> 베트남에 부는 중국어 열풍
중국어 학원마다 수강생 몰리고..대입서 한국어과 커트라인 추월
HSK 응시자 세계 1위...중국어 요구 채용공고 1년 새 50% 증가
중국, 대베트남 FDI 투자 신규 건수·신규 투자 등록액 1위
"당분간 중국어 열풍 이어질 것" 전망
【하노이(베트남)=김준석 특파원】"여러분, '러(了)'는 기초반에서 배웠던 과거형으로 동사 뒤에서 '완료'를 나타내는 것 이외에 문장 끝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지난 13일 베트남 하노이 시내 한 대형 중국어 학원. 강사의 설명이 이어지자 15명의 학생이 일제히 노트에 내용을 부리나케 받아 적었습니다. 10대부터 30대까지 연령대의 학생들은 강사의 판서 하나하나를 받아 적으며 학구열을 불태웠습니다.
이날 수업을 맡은 팜씨는 베이징 인민대 중문과 박사 출신으로 중국어 강의만 15년째 하고 있습니다. 팜씨는 "강의를 시작한 이후 올해 학생이 가장 많은 것 같다"며 "기초·회화반은 물론 HSK(한어수평고시) 5·6급 등 고급반까지 정원을 꽉 채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중문과 학생들이 학교 수업 보충을 위해 수강했다면, 최근에는 베트남 진출 중국 기업에 취업하기 위해 중국어를 배우려는 학생이 크게 늘었다고 변화를 전했습니다.
이같은 중국어 열풍의 배경 이면에는 중국의 투자가 있습니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미국의 대(對)중국 제재가 강화되면서 중국 첨단·제조기업들이 생산거점을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로 빠르게 옮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한국과 일본 기업이 동남아 제조업을 주도할 때 한국어와 일본어가 주요 외국어였다면, 이제 그 자리를 중국어가 빠르게 파고들고 있는 것이죠.
"취업 잘 된대" 소문에...대학 커트라인도 역전
변화는 대학 입시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의 생산기지가 대거 들어서면서 한때 한국어학과가 '취업 보증수표'로 통했습니다. 한국 기업의 공격적인 진출과 한류 열풍이 맞물리면서 한국어학과의 입시 커트라인도 고공행진했습니다. 한때 한국 언론에서는 '의대보다 들어가기 어려운 한국어학과'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하노이 주요 대학 일부에서는 중국어 관련 학과의 입시 커트라인이 한국어학과를 앞질렀습니다.
하노이대(구 하노이외대) 중국어학과의 올해 입학 커트라인은 34.35점으로 한국어과(34.10점)를 소폭 웃돌았습니다. 하노이국립대(VNU) 외국어대에서도 중국언어문화학과가 27.03점으로 한국어학과(24.69점)를 앞섰습니다.
차이는 크지 않습니다. 두 언어 모두 여전히 인기 외국어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높은 선호도를 유지해온 한국어학과를 중국어학과가 따라잡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끕니다.
HSK 응시자 수 1위...중국어 인재 '구인난'
중국어능력시험인 HSK에서도 베트남의 존재감은 두드러집니다.
2025년 베트남의 HSK 응시자는 14만6000명 이상으로 전체 해외 응시자의 19%를 차지하며 세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
베트남 문화부에 따르면 올해 1~6월 HSK 응시자는 약 11만명으로 추산됩니다. 전체 응시자 56만4000명의 약 20%에 해당하는 규모로, 올해도 베트남이 세계 최대 응시국 자리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타이응우옌대학교 고사장에서는 올해 상반기에만 3만9000명이 HSK에 응시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비전공자들도 중국어 열풍 대열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하노이국립대 외국어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강사인 딘 투 화이 박사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중국어과 학생들이 주로 수업을 들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중국어를 배우러 온다"며 "취업을 위해 중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확실히 늘었다"고 말했습니다.
실제 채용시장에서도 중국어의 영향력은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베트남 채용 플랫폼 잡오코(JobOKO)가 2025년 10개월간 58만1660건 이상의 채용공고를 분석한 결과, 중국어 능력을 요구한 일자리는 약 1만3000개로 전년보다 50%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중국어 인력 수요 증가 속도는 일본어의 약 2배, 한국어의 5배 이상에 달했습니다.
하노이 시내 HSK 학원 관계자는 "최근 중국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져 수업이 대부분 마감되고 있다"며 "기초반뿐 아니라 고급반과 비즈니스 중국어 프로그램까지 수강생이 크게 늘었다"고 전했습니다.
서점가에서도 변화가 감지됩니다. 외국어 교재 판매 순위 상위권을 중국어 관련 서적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초등학생까지 중국어 열풍..."베트남어 공부에도 도움"
중국어가 취업시장의 새로운 무기로 떠오르면서 학습을 시작하는 시기도 빨라지고 있습니다.
하노이 시내 한 대형 HSK학원에서 만난 학부모 항씨는 "딥시크나 중국의 로봇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앞으로 중국의 중요성이 더 커지지 않을까 생각해 초등학교 1학년 자녀를 보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베트남어도 한자어 비율이 높아 한자를 많이 알면 베트남어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며 "중국어 공부를 일찍 시작하게 한 것을 만족한다"고 덧붙였습니다.
학원 관계자는 "과거에는 일부 특수목적고나 영재고의 높은 경쟁률을 피해 중국어반이라는 틈새시장을 노리고 준비하는 학생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저학년 때부터 중국어를 시작해 고등학교 입학 전 HSK 5급이나 6급을 따는 학생들이 부쩍 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레드테크' 남하...중국어 열풍 지속될 전망
현지에서는 당분간 중국어 열풍이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중국의 대(對)베트남 투자가 증가하면서 중국어 인력 수요 역시 계속 커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중국 기업들은 국경을 맞댄 베트남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기지를 빠르게 확대하고 있습니다. 과거 섬유·신발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 중심이었던 진출 분야도 전자·배터리·전기차·태양광 등 첨단산업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대베트남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최근 2년간 신규 프로젝트 수 기준 1위인 1275건을 기록했습니다. 투자액 기준으로는 싱가포르와 한국에 뒤처져 있지만, 홍콩을 포함한 중국계 자본의 신규 등록 투자액은 지난해 약 53억7000만달러(약 7조4535억원)에 달했습니다.
애플 공급망의 주요 업체인 럭스셰어와 고어텍 등이 베트남 생산시설을 확대했고, 태양광 업체 트리나솔라와 전기차 업체 BYD·체리자동차 등도 현지 생산을 늘리고 있습니다.
변화는 공장 앞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북부 박닌성 꿰보공단의 고어텍 공장 앞에는 이력서를 직접 놓고 갈 수 있는 상시 접수대가 마련돼 있었습니다.
꿰보공단의 한 중국 기업 관계자는 "뽑아도 뽑아도 사람이 모자란다"며 "일부 기업에서는 일단 인력을 뽑은 뒤 자체적으로 무료 중국어 수업을 진행하거나 본사에 2~3개월간 파견하는 경우까지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동남아 돋보기]는 글로벌 공급망과 외교·안보의 핵심 요충지로 부상한 동남아시아의 주요 현안과 비하인드 뉴스를 현지에서 생생하고 깊이 있게 전하는 코너입니다.
[email protected] 김준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