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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한국경제 '포지티브 규제'의 틀을 깨자

파이낸셜뉴스

주52시간 1주 단위로 관리 고수
기업 유연한 근로방식 선택 막아
정부 혁신산업 육성 강조하지만
'타다'·원격진료등 활성화 발목
정부 압축성장기 규제 털어내고
포괄적이고 유연한 제도 전환해야

강성진 한국경제학회 회장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강성진 한국경제학회 회장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한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다양한 사회제도가 지나치게 경직되고 때로는 거칠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아 온 허용된 것만 가능하게 하는 포지티브형 제도와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요구하는 사회운영 방식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활동을 존중하고 이를 신뢰하는 문화는 아직 충분히 정착되지 못했다. 이러한 현실은 유엔의 '2025 세계행복보고서'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국의 종합 행복도는 147개국 중 58위였지만,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느끼는 정도와 관련된 '삶의 선택의 자유'는 101위에 그쳤다. 경제적 선진화에 비해 개인의 선택과 자율에 대한 체감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유학 시절 경험한 작은 일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건전지를 잘못 사 포장까지 뜯은 뒤 2주쯤 지나 상점에 가져갔다. 직원은 이유를 물었고 "잘못 샀다"는 대답을 듣자 더 이상 따지지 않고 현금으로 환불해 주었다. 이미 개봉한 물건이어서 당연히 반품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환불 자체보다 그 과정에 담긴 소비자에 대한 존중과 신뢰였다. 모든 가능성을 의심해 사전에 복잡한 규칙과 절차를 만드는 대신 상대방을 먼저 신뢰하고, 그 신뢰에 상응하는 책임을 요구하는 사회운영 원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비해 한국의 현실을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식당에서 식사하는 소비자에게 물이나 반찬 등 각종 셀프서비스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 소비자보다 공급자의 편의를 우선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논란이 된 고시원과 같은 주거시설의 기준을 살펴보면 욕조나 책상의 설치 여부까지 세부적으로 규정하고 있어 '이런 것까지 정부가 사전에 정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정부가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선택의 범위까지 정해 주어야 한다는 사고의 밑바탕에는 개인과 시장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개인의 자율과 책임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은 제도적 경직성은 우리 주변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주 52시간제를 1주일 단위로 관리하는 방식도 그렇다. 근로자의 건강권을 위해 총근로시간을 제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연장근로를 원칙적으로 1주 단위로 관리하면 일이 집중되는 시기에 더 일하고 이후 충분히 쉬는 유연한 근로방식을 선택하기 어려워진다. 혁신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혁신산업 육성을 강조하지만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실제 산업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포지티브형 규제가 장애물로 작용해 혁신생태계의 역동성을 떨어뜨린다. 과거 '타다 사태'를 비롯해 우버와 같은 승차공유 서비스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에어비앤비와 같은 공유숙박이나 원격의료의 활성화가 제한되어 온 현실을 보면 과연 이러한 규제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제도와 사고방식의 배경에는 한국의 독특한 성장경로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압축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성장 과정에서 시장과 개인이 스스로 선택하고 조정한 결과를 기다리기보다 문제가 발생하면 정부가 개입해 빠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회운영 방식도 남겼다. 정부와 국민 모두 장기적인 과정과 성과를 기다리기보다 단기간에 보이는 결과를 기대하는 데 익숙해졌다. 반면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오랜 기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계약, 경쟁과 시장의 조정을 경험하면서 이에 필요한 신뢰와 제도를 점진적으로 축적해 왔다.

한국은 이미 경제적 규모와 소득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경제적 선진화를 넘어 제도의 선진화를 이루는 일이다. 안전과 공정처럼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명확하게 세우되, 개인과 시장에 더 많은 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 사전적인 규제는 줄이고 의사결정 과정은 투명하게 하며, 선택의 결과에는 분명하게 책임지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생각과 선택을 인정하면서 충분한 토론과 사회적 타협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미리 정하고 빠른 결과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원칙은 지키되 개인과 시장을 신뢰하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며 그 결과를 기다릴 줄 아는 사회'로 전환하는 것, 그것이 압축성장 이후 한국이 지향해야 할 포용적이고 유연한 미래 제도의 모습이다.

강성진 한국경제학회 회장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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