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800조 슈퍼 재정, 지출 구조조정도 고삐 죄길
미래기금의 중복사업을 걸러내고
국가채무 줄여 재정체질도 바꿔야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25일 내년도 예산안의 큰 틀을 협의했다. 반도체 호황에 따른 세수 증가를 활용해 인공지능(AI)과 3대 메가프로젝트, 미래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청년과 지방, 양극화 대응 지원에도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내년 총지출은 올해 본예산보다 10% 이상 늘어난 800조원+α에 이를 전망이다. 금융위기 당시인 2009년 이후 처음으로 두 자릿수 증가율이다.
첨단산업을 둘러싼 국가 간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필요한 곳에 과감하게 재정을 투입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세수가 많이 걷힌다고 지출의 고삐까지 풀어선 안 된다. 내년 국세 수입은 반도체 호황 등에 힘입어 600조원을 넘어설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이런 때일수록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불필요한 고정지출을 걷어내고 국가채무를 줄여 재정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한번 만들어진 보조금이나 각종 현금성 지원제도는 경기가 나빠져도 줄이기 어려운 상시지출 항목이 되기 십상이다.
정부가 내년 50조원 넘는 지출 구조조정을 추진하고 있다지만 이 가운데 20조원가량은 교육교부금 제도 개편을 통한 지출 증가 억제 효과에 해당한다. 나머지 분야에서 어떤 사업의 지출을 얼마나 줄일 계획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기존 사업을 소폭 감액하는 수준이거나 종료된 한시사업을 구조조정 실적으로 포장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출을 덜어낸 자리에 무리한 신규 사업을 채우는 방식은 더더욱 곤란하다. 지출 구조조정은 사업 몇 개를 없애는 데 그쳐선 안 된다. 달라진 현실을 반영해 불필요한 상시지출을 수술하고 꼭 필요한 사업에 재원을 다시 배분하는 식이어야 한다.
새로 만드는 미래대응기금도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정부가 밝힌 기금의 주요 투자 분야는 청년과 AI 등 성장동력, 지방, 교육 분야다. 이날 당정이 제시한 800조원대 예산의 중점 투자 분야와도 상당 부분 겹친다. 정부는 미래대응기금을 세수 부족 시 재정 보강을 위한 안정화 장치로도 활용하고 필요하면 국채 상환에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목적과 용처가 이렇게 광범위한 100조원대 기금이 또 다른 슈퍼 예비비처럼 운용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한쪽에서 50조원 넘게 지출을 구조조정했다면서 비슷한 사업을 새 기금에 다시 담는 일이 없는지도 가려내야 한다.
과도한 돈 풀기가 경제에 미칠 부담도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2.8% 올랐고, 근원물가도 2%대 중반에 이른다. 냉면과 삼계탕, 김밥에서 집밥 재료까지 밥상 물가도 요동친다. 800조원대 확장재정이 생산성을 높이는 투자보다 현금성 지출로 흘러가면 당국의 물가안정 노력과 엇박자를 낼 수 있다.
빠르게 늘어난 국가채무를 줄이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도 중요하다. 초과 세수는 모두 새 사업에 쓰기보다 일부는 적자를 줄이고 빚을 갚는 것이 정상적인 재정 운용이다. 국가부채로 지금 난관에 부딪힌 미국의 사례가 교훈이다. 미국은 올해 정부 순이자 지출만 1조달러를 웃돌 전망이다. 막대한 부채와 이자 부담이 재정을 압박하고, 대규모 국채 발행이 시장금리를 끌어올려 다시 이자 부담 우려를 키운다. 국가채무가 정책의 선택지를 좁히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경기가 좋을 때 빚을 줄여야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 세수 호황기에 첨단산업에는 과감히 예산을 투입하되 이를 빌미로 불필요한 씀씀이까지 무한정 키우는 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