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에게는 휴식… 아이들에겐 꿈같았던 시간 [Weekend 문화]
"가족들 웃는 모습에 마음의 짐 덜어"
"눈앞에서 벌어진 마법에 깜짝" 소감
"매일 무거운 방화복을 입고 서울 곳곳의 화재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언제 비상벨이 울릴지 몰라 늘 예민한 상태로 지내는데, 오늘 가족들이 공연을 보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니 제 마음의 짐까지 씻겨 내려가는 기분입니다. 120분 동안 온전히 쉴 수 있었습니다."
지난 23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이은결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 '원 오브 원(ONE OF ONE)'을 관람한 서울소방재난본부 소속 소방관 김모씨의 말이다.
복잡한 도심의 화재·구조 현장을 누비는 김씨는 이날 만큼은 긴장을 내려놓고 평범한 가장으로 돌아갔다. 아내와 아이 곁에서 무대 위 환상의 세계를 함께 즐기고 웃었다. 언제 울릴지 모르는 출동 벨과 긴박한 현장 대신, 가족의 웃음소리로 채운 120분은 짧지만 온전한 휴식이었다.
최근 대형 화재와 산불, 수해 등 각종 재난이 이어지면서 일선 소방 인력의 정신적 피로를 관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참혹한 현장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소방관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와 수면장애, 불안 등을 겪기 쉽다. 이들이 긴장을 풀고 일상으로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정서적 지원이 재난 대응의 또 다른 과제로 떠오른 이유다.
이날 객석에는 소방관 가족 뿐 아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보호대상 아동 100명도 자리했다. 강릉보육원과 성애원, 심향영육아원, 원주아동센터, 더굿세이브 등 강원 강릉·원주와 경남 밀양 소재 아동 보호 시설의 아이들이 서울을 찾았다.
특히 가장 먼 경남 밀양에서 온 더굿세이브 아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서울행에 나섰다. 아이들을 인솔한 서영숙씨는 "오후 2시 공연에 늦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했다"며 "오가는 길이 멀어 지칠 법도 한데,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공연을 직접 본다는 생각에 차 안에서도 아이들의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했다.
수도권에 비해 대형 문화공연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 아동들에게 이번 나들이는 더욱 특별했다. 거대한 헬리콥터가 등장하고 화면 속 기차가 현실의 무대로 돌진하는 장면마다 아이들의 눈빛은 반짝였다. 화려한 무대 장치와 예술적 연출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객석 곳곳에서는 탄성과 박수가 이어졌다.
공연 내내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초등학교 4학년 이모군은 "화면 속에 있던 기차가 갑자기 무대로 튀어나와 깜짝 놀랐다"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법이 꿈만 같았다. 나도 커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가 이번 초청 행사를 마련한 이유도 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보듬기 위해서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근무하는 소방관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휴식을, 보호대상 아동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미래를 꿈꿀 기회를 선물한다는 취지다.
재난 구호의 범위도 달라지고 있다. 성금과 구호물품을 전달하고 무너진 시설을 복구하는 데서 나아가, 재난을 겪은 이들과 현장을 지키는 구호 인력의 마음까지 돌보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문화예술을 통한 정서 지원은 그중 하나다.
무대 위 마술은 120분 만에 막을 내렸지만, 객석에 남은 변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소방관들은 가족의 웃음 속에서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고, 아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환상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그렸다. 누군가에게는 휴식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꿈이 된 시간. 이날의 진짜 마법은 무대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났다.
유선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