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선배한테 깨지면서 일 배우는 막내? 요즘 없어요" 일머리도 AI한테 [AI 사피엔스-지적 주권을 묻다④]

한승곤 기자
파이낸셜뉴스

[보고서 초안부터 AI에게 맡긴 일터]
자료 정리와 보고서 구성까지
업무 배우는 순서까지 바뀌는 근무환경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사진=챗GPT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사진=챗GPT

AI는 보고서 초안 작성, 회의록 정리, 시장 자료 검색 등 일터의 문서 작업에 쓰이고 있습니다. 처리 속도는 빨라졌지만, 원자료를 읽고 판단 기준을 세우며 일을 익히는 시간은 줄어들 수 있습니다. 4부에서는 AI가 기업의 일하는 방식과 직장인의 숙련 과정, 업무 환경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살펴봤습니다.

[파이낸셜뉴스] #. 입사 2년 차 직장인 A씨는 시장조사 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회사 내부 자료를 인공지능(AI)에 입력한다. 자료를 항목별로 정리하고 표와 결론까지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면 몇 분 안에 보고서 초안이 완성된다.

A씨는 문장을 고치고 숫자를 원문과 대조하는 일에는 익숙해졌다. 하지만 최근 회의에서 팀장이 "이 수치를 근거로 어떤 판단을 내렸느냐"고 묻자 바로 답하지 못했다. AI가 만든 결론에 어떤 자료가 쓰였는지 다시 찾아봐야 했다.

그는 "보고서를 쓰는 시간은 줄었지만, 자료를 처음부터 읽으며 업무를 배우는 시간도 함께 짧아졌다"며 "초안의 문제를 찾는 일과 업무를 처음부터 이해하는 일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

신입사원도 일 척척…AI가 만든 보고서

보고서 초안 작성, 번역, 회의록 정리, 시장 자료 검색 같은 업무에 AI를 쓰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자료를 입력한 뒤 핵심 내용과 예상 질문, 결론의 방향까지 한 번에 요청하는 방식이다. 초안이 만들어지면 사용자는 문장을 다듬거나 회사 양식에 맞게 수정한다.

문서의 완성도는 높아질 수 있지만, 신입사원 등 입사 초년생이 업무를 익히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긴다. 과거에는 자료를 읽고 선배에게 질문하며 보고서의 구조를 배웠다면, 지금은 AI가 만든 결과물을 고치는 과정에서 업무를 접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30대 사무직 B씨는 고객 문의를 정리하는 업무에 AI를 사용한다. 여러 건의 문의를 입력하면 AI가 불만 유형과 처리 우선순위를 나눠준다. B씨는 표를 그대로 팀 공유자료에 넣었다가, 한 고객의 반복 민원이 단순 문의 항목에 포함된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B씨는 "문장을 다시 쓰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어떤 문의가 먼저 처리돼야 하는지는 원문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며 "AI가 정리한 표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결국 처음 자료로 돌아가야 했다"고 말했다.

AI가 만든 초안과 업무의 최종 책임은 분리돼 있다. AI가 자료를 요약해도 어떤 자료를 믿을지, 빠진 내용은 없는지, 결론이 업무 목적에 맞는지는 사람이 판단해야 한다. 초년생에게는 이 검토 과정도 필요하지만, 원자료를 읽고 질문을 만드는 경험 자체가 줄어들 수 있다.

일자리보다 업무 순서 변화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사진=챗GPT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사진=챗GPT


AI가 일터에 미치는 영향은 '일자리가 사라질지'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실제 변화는 직업 전체보다 직무 안의 세부 업무에서 먼저 나타난다. 보고서 초안, 자료 요약, 고객 문의 분류처럼 반복되는 작업이 AI에 넘어가면 사람에게 남는 일의 순서와 내용도 달라진다.

국제노동기구(ILO)와 폴란드 국립연구소(NASK)가 2025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일자리 4개 중 1개가 생성형 AI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고소득 국가에서는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 비중이 34%로 전체 평균보다 높았다. 다만 보고서는 직업 전체가 사라지는 경우보다 업무의 일부가 바뀌는 경우가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노동시장에서도 비슷한 분석이 나왔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함께 개최한 세미나에서 노세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직무 전체가 대체되는 비중을 8.4%로 제시했다. 56.6%는 일부 과업이 대체되고, 35.1%는 기존에 없던 신규 업무가 생기는 것으로 분석했다.

AI가 사람의 일을 통째로 없애기보다 업무의 구성과 순서를 바꿀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자료를 직접 정리하는 일은 줄어들 수 있지만, AI가 만든 결과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여러 자료를 비교하며 고객이나 현장의 맥락을 반영하는 일은 더 중요해진다.

신입사원이 익히던 반복 업무의 의미도 달라진다. 단순 자료 입력과 초안 작성이 줄어들면 신입 직원은 반복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반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익히던 산업 지식과 문서 작성 방식, 판단 기준을 배울 기회는 줄어들 수 있다.

막내의 AI 보고서 좋지만…'검토' 능력 부족

AI가 만든 결과를 고치는 일도 하나의 업무가 됐다. 보고서 초안을 검토하려면 숫자가 원자료와 맞는지, 빠진 조건은 없는지, 결론이 회사의 의사결정에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문장만 다듬는 능력으로는 부족하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연구보고서 '인공지능 시대의 숙련'은 생성형 AI 확산에 따라 노동시장에서 요구되는 숙련의 구조가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120개 숙련 키워드 가운데 47.5%만 교육과정에 반영됐으며, 생성형 AI와 빅데이터 플랫폼, 책임 있는 AI 관련 숙련은 산업 수요에 비해 교육과정 반영이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런 변화는 A씨와 B씨의 경험과도 이어진다. AI가 표와 결론을 만들어도 회의에서 설명할 사람은 A씨다. 고객 문의를 유형별로 나눈 표가 있어도 어떤 민원이 먼저 처리돼야 하는지 판단할 사람은 B씨다. AI가 초안을 만들수록 사람에게 필요한 일은 결과를 읽고, 의심하고, 업무 맥락에 맞게 다시 판단하는 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결과를 검토하려면 먼저 원자료를 읽어본 경험이 필요하다. 어떤 숫자가 중요한지, 반복되는 민원이 왜 문제인지, 보고서 결론이 어떤 의사결정으로 이어지는지는 초안을 고치는 과정만으로 익히기 어렵다. AI가 앞단의 작업을 대신할수록 신입사원이 업무의 기본 구조를 배울 통로를 따로 마련해야 하는 이유다.

청년 노동자에게 더 큰 변화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사진=챗GPT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해 AI로 생성한 이미지.사진=챗GPT


생성형 AI의 영향은 모든 직장인에게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업무 경험이 많은 사람은 AI가 만든 결과를 비교하고 수정할 기준을 갖고 있을 수 있다. 반면 이제 업무를 배우는 사람은 AI가 만든 초안을 보며 처음부터 결론을 접하게 된다.

ILO가 2026년 6월 발표한 실증연구 검토 보고서는 생성형 AI의 위험으로 불평등 확대와 젊은 노동자의 고용 기회 약화, 노동자의 자율성과 일자리 질 변화를 제시했다. AI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과 AI 결과를 검토할 지식이 있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업무 성과와 고용 기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초년생에게 중요한 것은 AI를 쓰는지 여부만이 아니다. AI가 만든 초안을 어느 단계에서 받아보는지도 영향을 준다. 원자료를 읽기 전에 결론부터 받으면 업무 속도는 빨라지지만, 자료를 보며 의문을 만들고 판단 기준을 세우는 시간은 줄어든다.

이와 관련해 A씨는 AI 사용을 중단하지 않았다. 대신 초안을 받기 전에 원자료에서 핵심 수치와 쟁점을 먼저 표시하고, AI가 만든 결론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업무 순서를 바꿨다. 그는 "AI가 만든 문서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제가 그 업무를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회의에서 설명할 수 있는 자료인지부터 확인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는 생성형 AI가 일자리를 한꺼번에 없애기보다 업무 내용과 필요한 숙련을 바꾸고 있다고 설명한다. 파베우 그미렉 ILO 선임연구원은 ILO인터뷰에서 생성형 AI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두고 "일자리 대재앙이 아니라 일자리의 변화"라고 강조했다. 그는 "생성형 AI의 영향은 직업과 국가에 따라 다르며, 정책 대응과 사회적 대화가 생산성과 일자리 질을 함께 높이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email protected] 한승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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