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합1등, 구리 아니다' 70년 화학 교과서 정설 뒤집혀
[파이낸셜뉴스] 구리가 가장 안정적으로 결합한다는 화학 교과서 정설이 달라졌다. 금속과 직접 결합하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주변의 약한 수소결합만 조절하면 구리는 정 반대의 역할을 했다. 즉, 금속의 환경을 바꾸면 금속의 결합 성질은 변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다. 이는 원하는 금속을 골라내는 분리 기술과 촉매 설계 등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라는 기대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는 화학과 백윤정 교수 연구팀이 비타민 B2의 핵심 구조인 플라빈(flavin)을 이용해 금속을 중심으로 여러 분자가 둘러싸 결합한 '금속 착물'을 개발하고, 금속 주변의 수소결합(hydrogen bonding)을 조절해 기존 '어빙-윌리엄스 계열(Irving-Williams series)'과 반대되는 금속 안정성 경향을 구현했다고 6일 밝혔다.
어빙-윌리엄스 계열은 철·니켈·구리처럼 다른 물질과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전이금속이 주변 분자와 얼마나 안정적으로 결합하는지를 순서로 나타낸 경험 법칙이다. 망간(Mn), 철(Fe), 코발트(Co), 니켈(Ni), 구리(Cu), 아연(Zn) 가운데 일반적으로 망간에서 구리로 갈수록 안정성이 높아지고, 특히 구리가 매우 안정한 결합을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차이는 금속 안에서 전자들이 어떻게 배치돼 있는지를 뜻하는 '전자 구조(electronic structure)'에 따라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돼 왔다. 다시 말해 어떤 금속이 더 잘 붙는지는 각 금속이 원래 가진 특성에 크게 좌우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연구팀은 금속과 직접 결합하는 부분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 작용하는 '수소결합'에 주목했다. 수소결합은 분자와 분자 사이에서 작용하는 비교적 약한 힘으로, 주변 구조를 일정한 형태로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연구팀은 금속 주변의 기본 조건을 같게 한 뒤, 수소결합이 각 금속의 안정성에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 살펴봤다.
그 결과 수소결합이 특히 구리가 안정해지는 데 필요한 구조 변화를 막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구리는 주변의 결합 구조를 조금 변형해 자신에게 유리한 형태를 만들면서 더욱 안정해지는 특성이 있다. 하지만 연구팀이 만든 구조에서는 주변의 수소결합이 구리를 단단히 잡아주면서 기존과 반대되는 '반(反) 어빙-윌리엄스 경향(anti-Irving-Williams trend)'이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구리가 '결합 1등'에서 밀려났다는 것 자체보다, 금속마다 정해져 있다고 여겨졌던 '잘 붙는 순서'를 주변 환경을 바꿔 조절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여러 금속이 섞여 있을 때 원하는 금속은 잘 붙게 하고 다른 금속은 덜 붙게 만들 수 있다면, 필요한 금속만 골라내거나 회수하는 기술에 활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원리는 원하는 금속이 더 잘 작용하도록 주변 환경을 조절하는 촉매 설계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기대다. 또 우리 몸의 단백질과 효소가 철·구리·아연 등 여러 금속 가운데 필요한 금속을 골라 사용하는 것처럼, 생명체의 작동 원리를 본떠 필요한 기능을 구현하는 '생체모사 시스템(biomimetic system)'을 설계하는 데도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번 연구는 미국화학회(ACS)가 발행하는 국제 학술지 '미국화학회지(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 JACS)'에 9월 3일자로 게재됐다. 또 덴마크에서 개최된 국제배위화학학술대회(International Conference on Coordination Chemistry, ICCC)에서도 주목받으며, 제1 저자인 KAIST 화학과 임하늘 석박사통합과정 학생이 이번 연구를 포스터로 발표해 한국인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우수 포스터상을 수상했다.
[email protected] 연지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