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겟돈' '램포칼립스' D램 부족에 모든 전자 제품 다 비싸진다
[파이낸셜뉴스]
D램 부족 사태가 부른 아마겟돈, 이른바 '라마겟돈(RAMageddon)'이 소비자 전자 제품 시장을 강타하고 있다. 인공지능(AI)이 D램 반도체를 싹쓸이하면서 메모리 부족으로 거의 모든 전자 제품 가격이 뛸 것으로 우려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값은 내리고, 성능은 좋아지는 가전제품 시장의 경향이 역전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현지시간) 지난 수십년 점점 더 진화하는 고성능 가전제품을 싼값에 즐기던 소비자들이 AI 시대를 맞아 강한 역풍에 직면했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영국 소매 컨소시엄(BRC) 수석 이코노미스트 하비르 딜런은 AI 투자 붐이 메모리 가격과 기타 부품 가격을 끌어올리면서 "추세가 뒤집혔다"고 말했다. 애플을 비롯한 주요 제조업체들은 판매 둔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미 가격을 인상했다.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의 황민성 리서치 센터장은 소비가전 분야에서는 "말 그대로 모든 게" 메모리 부족 영향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마트폰, PC, 비디오게임 콘솔 등에 필수적인 D램은 하이퍼스케일러의 수요가 폭증하면서 심각한 공급 부족을 겪고 있다. 이 때문에 가전 업체와 소매상들이 비용 상승 압박을 받고 있다. 하이퍼스케일러는 대규모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클라우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같은 업체들을 일컫는 말이다.
심각한 메모리 부족 속에 투자자들은 샌디스크, SK하이닉스 같은 메모리 설계, 제조업체들 주식을 대거 사들이고 있다. 이들 주가는 올 들어 각각 1000% 이상 폭등했다. 다만 최근에는 이런 붐이 오래가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로 강한 매도세에 직면하기도 했다.
증시 투자자들의 비관 전망과는 별개로 소비자들은 일상 가전제품 가격 상승에 직면해 있다. 시장조사 업체 IDC에 따르면 제조사와 소매업체들은 이미 가격을 최대 20% 인상했다.
레딧의 PC, 게임 포럼에서는 가격 상승세가 지나치게 가파르다면서 메모리 부족 사태를 '라마겟돈' '램포칼립스(RAMpocalypse)'로 부르고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인류 최후의 전쟁 아마겟돈(Armageddon), 종말에 일어날 일을 계시하는 요한계시시록(Apocalypse)을 비튼 말이다.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D램 가격은 지난 1년간 5배 폭등했다. 계약 가격은 분기별로 10~20%씩 오른다.
반도체 업체들은 소비가전에 사용되는 저사양 반도체 생산을 중단하거나 줄였다. 마진이 훨씬 큰 AI용 HBM(고대역폭 메모리) 생산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공급 부족이 가장 심각한 분야는 D램이지만 GPU(그래픽처리장치), CPU(중앙처리장치) 등 다른 반도체 분야도 공급이 달리고 있다.
소비자들은 1970년대 이후 해가 갈수록 더 좋은 전자 제품을 더 싼 값에 이용해왔다. 반도체 기술 발전 덕이다.
그 바탕에는 이른바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깔려 있었다. 마이크로칩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 개수가 2년마다 2배로 늘어난다는 법칙이다. 소비자들도 더 싼 값으로 더 강력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흐름은 역전되고 있다.
애플은 지난 6월 일부 노트북 컴퓨터와 태블릿 PC 가격을 인상했다. 최고 사양 모델은 최대 300달러(약 40만원) 올렸다. 전망도 비관적이다. 메모리를 비롯한 부품 부족으로 판매 성장세가 둔화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가장 타격이 큰 곳은 게이밍 시장이다.
MS, 소니, 닌텐도 같은 콘솔 제작사는 이미 하드웨어에서는 밑지고 팔았던 터라 비용을 흡수하기가 더 어렵게 됐다. 이 시장은 콘솔을 싸게 제공하는 대신 게이밍 소프트웨어와 구독으로 돈을 버는 구조다.
이런 사업 구조에서도 콘솔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게 됐다. 최근 수개월 간 최대 150달러가 뛰었다.
닌텐도는 지난 5월 연간 영업이익의 약 30%와 맞먹는 1000억엔(약 8640억원)의 예상치 못한 비용을 보고했다. "치솟는 부품비, 특히 메모리"를 이유로 댔다. 닌텐도 주가는 올 들어 약 25% 폭락했다.
휴대폰 가격도 뛰고 있다.
카운터포인트 황 센터장은 스마트폰용 D램 가격이 지난 1년 동안 250달러 올랐고, 이 비용은 올가을 신형 휴대폰에 전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격 인상은 매출 타격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암페어 어낼리시스 분석에 따르면 소니나 MS가 현재 700달러 안팎인 콘솔 가격을 1000달러 이상으로 책정하면 앞으로 5년에 걸쳐 판매량이 최대 43% 급감할 수 있다. 5년 안에 판매량이 반 토막 난다는 것이다.
피어스 하딩-롤스 암페어 게임 부문 리서치 총괄은 콘솔 업체들이 더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공급하기 위해 "혁신을 강요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아울러 비용을 흡수하기 위해 '게임 내 광고' 논의가 재개되고, 새로운 형태의 구독 결합 상품(번들)을 내놓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애널리스트들은 가전업체들이 불가피한 가격 인상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양을 고급화하는 전략을 택할 것으로 전망했다. 프리미엄 가전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운터포인트 황 센터장에 따르면 샤오미, 오포, 비보 같은 가성비 제품을 판매하는 중국 업체들은 '제대로 된 고통'을 받을 전망이다. 이들의 고객들은 가격 인상을 쉽사리 감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체들은 공급 부족에 대응해 설비 확충에 나섰지만 이 설비 완공과 가동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한동안 전자제품 가격 고공행진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황 센터장은 새 가전제품이 시급한 소비자들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구입할 것을 권고했다. 그렇지 않다면 업체들이 고가에 걸맞은 성능 향상에 나설 때까지 기다리라고 충고했다.
[email protected] 송경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