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2역 "회장님 곽동신, 작가 곽신"…알루미늄에 새긴 '사랑'
(서울=뉴스1) 양새롬 기자
이 알루미늄을 한번 들어보세요. 무겁죠?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서울옥션 강남센터 지하 4층. 전시장을 안내하던 도슨트가 옆에 놓인 알루미늄 덩어리를 가리켰다. 직접 들어보니 제법 묵직했다. 그런데 전시장 벽에 걸린 작품은 같은 금속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가벼워 보였다.
비결은 '깎아내는' 과정에 있었다. 사각형 알루미늄 덩어리를 컴퓨터로 설계한 뒤 CNC 밀링 장비에 데이터를 넣으면 기계가 금속을 정밀하게 절삭한다. 벽에 걸 작품은 속을 파내 무게를 줄이고 뒤쪽을 불룩하게 가공한다.
처음에는 묵직한 금속 덩어리였던 것이 여러 차례 설계와 가공을 거쳐 하트와 달러, 시계 모양의 작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반도체 장비를 만들던 기술이 이번에는 미술 작품을 만드는 데 쓰였다. 한미반도체 곽동신 회장이 '곽신'이라는 작가명으로 첫 개인전 'ENDLESS'를 열었다. 29년간 산업 현장에서 쌓은 금속과 정밀가공 경험을 예술로 풀어냈다.
알루미늄 덩어리를 하트·달러·시계로
전시장에 들어서면 온통 하트와 달러 기호, 시계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각각 '엔드리스 러브(Endless Love)', '슈퍼 리치(Super Rich)', '포에버 영(Forever Young)'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트는 사랑, 달러는 부와 성공, 시계는 영원한 젊음을 상징한다. 단순한 기호를 반복적으로 배치해 하나의 패턴을 만드는 방식이다. 엔드리스 러브에는 알루미늄 하트가 반복되고, 슈퍼 리치에는 달러 기호가 캔버스를 채운다.
포에버 영 작품에는 시계가 등장하지만 시침과 분침이 없다. 시간을 특정 시점에 묶어두기보다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을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작품 제작 과정은 일반적인 조각과도 조금 다르다. 거푸집(틀)에 금속을 부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알루미늄 덩어리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계속 깎아내는 방식이다. 컴퓨터를 이용한 정밀 설계(AUTOCAD)와 컴퓨터 제어로 금속을 깎아내는 절삭 가공(CNC 밀링), 산업용 로봇의 절삭을 거쳐 작품이 완성된다.
산업 현장에서라면 제품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한 공정이지만 전시장에서는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창작 과정이 된다. 설계하고, 깎고, 다시 수정하고, 원하는 형태가 나올 때까지 반복하는 이 과정은 반도체 장비를 만드는 과정과도 닮았다.
전시장 관계자는 산업용 설비와 기술을 이용해 이처럼 정밀한 조형 작품을 만드는 방식이 순수예술 영역에서는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알루미늄을 사용하더라도 어떤 기술과 방식으로 가공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도 있었다. 바로 원자재 가격이다. 작품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전쟁 여파로 알루미늄 원자재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곽신 작가도 적잖이 놀랐다는 후문이다.
29년 산업 경험, 컬렉터에서 작가로
곽 회장은 어린 시절 '트랜스포머', '백 투 더 퓨처', '로보캅' 같은 SF 작품에 등장하는 기계에 매료됐고 자동차와 로봇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이후 반도체 장비 산업에서 29년간 금속과 정밀가공 기술을 다뤘다.
설계부터 가공·조립까지 정밀함과 반복을 중시하는 제조 현장의 경험이 이번 작품 제작 방식에도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오랜 기간 미술품을 수집해 온 컬렉터였다는 점도 작업 배경으로 꼽힌다. 필립 콜버트와 야요이 쿠사마 등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반복과 무한이라는 개념을 자기 작품에 담았다.
서울옥션에 따르면 평일에는 100명 안팎, 주말에는 200~300명가량이 전시장을 찾고 있다. 유명 기업인의 첫 개인전이라는 점 때문에 방문하는 관람객도 있지만, 작품을 직접 본 뒤에는 생각보다 정교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전시장 관계자는 "처음에는 유명 기업인의 취미 활동 정도로 생각하고 온 분들도 작품을 보고 나면 반응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전했다.
전시는 오는 15일까지다. 입장료는 무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