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건강

[한동하의 본초여담] 장기적인 출혈에는 먼저 보(補)해야 한다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오랫동안 출혈이 이어져 기혈이 쇠한 경우에는 단순히 피를 멎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먼저 허실(虛實)을 살펴 기혈을 보하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치료가 필요하다. 챗GPT에 의한 AI생성 이미지
오랫동안 출혈이 이어져 기혈이 쇠한 경우에는 단순히 피를 멎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먼저 허실(虛實)을 살펴 기혈을 보하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치료가 필요하다. 챗GPT에 의한 AI생성 이미지

어느 날 고을의 높은 벼슬아치였던 왕대성(王大成)의 아내가 붕루를 앓게 되었다. 왕대성의 아내는 이미 여러 달 동안 하혈을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사물탕(四物湯)에 여러 가지 지혈약을 더하여 복용하였다. 약을 먹으면 며칠 동안 피가 줄어드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하혈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은 집안일로 크게 화를 낸 뒤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고, 그날 밤부터 하혈이 더욱 심해졌다. 왕대성의 집에서는 급히 고을의 한 의원을 불렀다.

의원이 왕대성의 집에 도착하여 부인의 맥을 짚어보니 맥이 크고 빨랐다. 의원은 말했다.

"부인이 크게 화를 내어 화기(火氣)가 치솟은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열이 나고 출혈도 심해진 것입니다. 서둘러 열을 내리고 피를 멎게 하는 차고 서늘한 성질의 약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의원이 처방한 약을 먹고 난 뒤에도 출혈은 멎지 않았다. 오히려 옆구리와 배가 쥐어짜듯 아프기 시작했다. 손발은 싸늘하게 식었고, 부인은 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였다.

왕대성은 치료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그래서 평소 명성이 높았던 다른 의원을 불렀다. 그 의원은 특히 부인병을 잘 치료한다고 이름이 나 있었다.

의원은 왕대성의 아내를 자세히 진찰하였다.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고 입술은 창백했다. 몸에는 약간 열이 나는 듯했다. 배는 몹시 아팠지만 손으로 눌러 따뜻하게 감싸주면 오히려 편안해하였다. 맥은 겉으로는 크고 힘차게 느껴졌으나, 의원이 손가락에 힘을 주어 깊이 눌러보자 속에는 힘이 없었다.

의원은 왕대성에게 물었다. "이전에 어떤 약을 복용했습니까?"

왕대성이 대답했다. "평소에는 집에서 사물탕에 지혈약을 넣어 복용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증상이 심해지자 앞서 온 의원이 차고 서늘한 약을 처방했습니다."

의원이 말했다. "부인은 오랫동안 피를 흘려 이미 기혈이 쇠한 데다 차가운 약까지 거듭 복용하여 비위의 양기마저 손상되었습니다. 불을 끄겠다고 찬물을 계속 붓다가 아궁이의 불씨까지 꺼뜨린 것과 같습니다. 지금 속은 더욱 차고 허해졌습니다."

의원은 이를 비위허한(脾胃虛寒)으로 판단하였다. 왕대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피를 이렇게 많이 흘리고 있는데 따뜻한 약을 써도 되겠습니까? 옛말에 통증에는 보법을 쓰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은 피가 뜨거워서 쏟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를 붙잡아 둘 기운이 부족하여 새어나가는 것입니다. 통증이 있다고 해서 모두 보법을 피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허하고 차가워서 생긴 통증이라면 오히려 보하고 따뜻하게 해야 합니다."

의원은 먼저 부자이중탕(附子理中湯)을 처방하였다. 부자와 건강으로 속을 따뜻하게 하고, 인삼과 백출로 쇠약해진 비위의 기운을 북돋우려는 것이었다.

약을 복용하자 차갑던 손발에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배와 옆구리의 극심한 통증도 차츰 줄어들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몸에서 나던 열도 가라앉았다.

의원은 그 뒤 기혈을 보하고 비위의 기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제생귀비탕(濟生歸脾湯)과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을 처방하고, 습담(濕痰)을 제거하기 위해 이진탕(二陳湯)을 더하였다. 그러자 오래도록 멎지 않던 붕루가 눈에 띄게 줄어들더니 마침내 완전히 멎었다.

왕대성이 감탄하며 물었다. "처음 의원은 열을 내리고 피를 멎게 해야 한다고 했는데, 선생은 오히려 몸을 따뜻하게 하고 보하는 약을 쓰셨습니다. 어찌하여 정반대의 치료로 병이 나은 것입니까?"

의원이 대답했다. "몸에 열이 난다고 해서 모두 실열(實熱)은 아니고, 맥이 크다고 해서 모두 실증(實證)인 것도 아닙니다. 오랫동안 피를 흘린 사람은 원기가 크게 상하여 오히려 맥이 겉으로 크게 뛸 수도 있습니다. 또한 통증이 있다고 해서 보약을 쓰지 말라는 말에만 얽매여서도 안 됩니다. 허하고 차가워서 생긴 통증이라면 오히려 보하고 따뜻하게 해야 통증도 사라집니다."

왕대성의 아내가 오랜 붕루에서 회복했다는 소문은 곧 고을 안에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의(錦衣)의 직책을 맡고 있던 양영흥(楊永興)의 아내도 그 의원을 찾아왔다. 그 부인 역시 오랫동안 붕루를 앓고 있었다.

양영흥의 아내 또한 처음에는 피를 멎게 하려고 여러 가지 차고 서늘한 약을 복용하였다. 그러나 약을 먹을수록 상태는 오히려 나빠졌다. 배가 더부룩하고 답답하여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고 몸에서는 열이 났다. 가슴은 번조하여 가만히 있지 못했으며 밤에도 제대로 잠들지 못하였다.

가족들은 부인을 데리고 왕대성이 소개해 준 의원을 찾았다. 의원이 진찰해보니 맥은 홍대(洪大)하면서도 허했다. 겉으로는 큰물이 밀려오듯 크게 뛰었으나 속에는 힘이 없었다. 낯빛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입술에도 핏기가 없었다.

의원은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팔진탕(八珍湯)에 포건강(炮乾薑)을 더하여 따뜻하게 보해야 합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살리기 어렵습니다."

팔진탕은 기를 보하는 사군자탕과 혈을 보하는 사물탕을 합한 처방이다. 여기에 포건강을 더하여 속을 따뜻하게 하면서 허해진 기혈을 보하고 출혈을 거두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양영흥의 가족들은 선뜻 의원의 말을 따르지 못했다. 몸에 열이 나고 피가 계속 쏟아지는 상황에서 따뜻한 약을 쓴다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일단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한 뒤 의원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전에 치료하던 의원을 다시 불렀다. 가족들은 그 의원에게 전날 왕대성의 아내를 치료했던 의원이 팔진탕에 포건강을 넣어 써야 한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이전 의원이 말했다. "몸에 열이 이렇게 심하고 피가 계속 쏟아지는데 따뜻한 약이라니요. 지금 필요한 것은 피를 멎게 하고 화(火)를 내리는 약입니다."

가족들의 마음도 다시 이 의원의 말에 기울었다. 결국 가족들은 팔진탕 대신 다시 차고 서늘한 지혈약과 화를 내리는 약을 복용시켰다.

그러자 부인의 병세는 급격히 나빠졌다. 입맛이 완전히 끊어졌고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하였다. 몸은 몹시 쇠약해졌지만 번조는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숨이 차고 식은땀이 났으며 손발은 차갑게 식었다. 여러 가지 허증(虛證)이 마치 벌떼처럼 한꺼번에 일어났다.

그제야 양영흥은 다급히 사람을 보내 왕대성의 아내를 치료했던 의원을 다시 불렀다. 의원이 도착하여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오랫동안 맥을 짚던 의원은 조용히 손을 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영흥이 다급히 물었다. "지금이라도 선생이 말씀하신 보하는 약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의원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때를 놓쳤습니다. 비위의 기운은 거의 끊어졌고, 원기는 약을 받아들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며칠 뒤 부인은 결국 세상을 떠났다. 양영흥은 뒤늦게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자궁출혈을 치료할 때 출혈이라는 현상만 보고 무조건 지혈하는 것은 옳지 않다. 먼저 출혈의 원인을 정확히 찾아야 한다. 자궁근종이나 자궁선근증, 배란장애, 자궁내막 질환, 임신과 관련된 출혈, 혈액응고장애 등 다양한 원인을 감별하는 것이 우선이다.

다만 장기간 출혈이 이어지면서 빈혈과 기력 저하, 식욕부진, 어지럼증, 창백한 안색, 전신쇠약이 심해진 환자라면 출혈을 조절하는 동시에 이미 소모된 기혈과 체력을 회복시키는 치료도 필요하다.

옛 의가들이 "장기적인 출혈에는 먼저 보(補)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는 출혈이 있다고 무조건 보약부터 써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오랫동안 피를 흘려 몸이 이미 허손된 사람에게까지 열과 출혈이라는 겉으로 드러난 증상만 좇아 공격적인 치료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말이다.

병을 치료할 때는 눈앞에 드러난 증상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증상이 생겨난 까닭과 환자의 몸이 현재 허한지 실한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교주부인양방> ○ 大尹王大成之內, 久患崩, 自服四物止血之劑, 或作或撤. 因怒發熱, 其血不止, 服前藥不應, 乃主降火, 更加脇腹大痛, 手足具冷. 余曰, 此脾胃虛寒所致, 先用附子理中湯, 體熱痛止. 又用濟生歸脾ㆍ補中益氣ㆍ二陳, 崩血頓癒. 若泥痛無補法, 則誤矣. (대윤인 왕대성의 아내가 오래도록 붕루를 앓아 직접 사물탕과 지혈약을 복용하였는데, 간혹 효과가 있기도 하고 간혹 효과가 없기도 하였다. 그런데 화를 내는 바람에 열이 나고 붕루의 출혈이 멎지 않아 앞의 약을 복용하였지만 효과가 없어서 火를 내리는 약을 위주로 썼더니 추가적으로 옆구리와 배가 몹시 아프고 손발이 모두 싸늘해졌다. 내가 "이것은 비위가 허한한 것으로 인한 것이다."고 말하고는 먼저 부자이중탕을 썼더니 몸에 열이 나고 아픈 것이 멎었다. 다시 제생귀비탕과 보중익기탕 및 이진탕을 썼더니 붕루의 출혈이 완전히 멎었다. 만약 통증에는 보법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이론으로 인해 그릇되게 판단한다면 잘못하는 것이다.)

○ 錦衣楊永興之內, 患前症, 過服寒凉之劑, 其症益甚, 更加肚腹痞悶, 飮食不入, 發熱煩躁, 脈洪大而虛. 余曰, 此脾經氣血虛而發躁也. 當急用八珍湯, 加炮薑以溫補之, 緩則不救. 彼不信, 乃服止血降火之劑, 虛症蜂起, 始信余言, 緩不及治矣. (금의인 양영흥의 아내가 앞의 병증을 앓았는데, 차갑고 서늘한 성질의 약을 지나치게 복용하여 그 증상이 더욱 심해졌고 게다가 배가 더부룩하고 갑갑하게 되어 음식을 먹지 못하고 열이 나고 번조로워 하였는데, 맥은 큰물처럼 콸콸하고 크면서 허하였다. 내가 "이것은 비경의 기와 혈이 허약하여 번조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팔진탕에 '포건강'을 가미하여 온보하여야 하는데 늦으면 목숨을 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믿지 않고 피를 멎게 하고 화를 내리는 약을 복용하였는데, 허증의 증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고 그때야 비로소 내 말을 믿게 되었지만 뒤늦어서 치료할 수 없었다.)

/ 한동한 한동하한의원 원장
[email protected]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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