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fn광장] 길 잃은 '대법관 제청'

파이낸셜뉴스

대법관 후보 놓고 靑·대법원 대립
제청권·임명권 법 해석 이견 노출
과거 정권도 '제청 대립' 빈번해
양측 '양보 후 봉합' 관행 정착
정치적 협의없이 법대로땐 '악순환'
상호존중 전제돼야 민주주의 작동

김규성 정치부장
김규성 정치부장

조희대 대법원장의 지난 11일 '법원의 날' 기념사는 의미심장했다. 법원의 날은 사법부 탄생일 기념일이자 사법부 독립을 되새기는 날이다. 원래는 13일이지만 일요일이라 행사를 당겼다. 조 대법원장은 법원이 다른 국가기관이나 정치권력 등 부당한 간섭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법치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시라면 원론적 발언이어서 주목도가 낮았을 듯싶다. 주요 신문 지면을 차지할 뉴스거리도 아니다. 대법관 후보자를 놓고 청와대와 대법원 사이가 극도로 긴장상태인 현재는 다르다. 헌정사 처음으로 청와대가 대법원장이 제청한 대법관 후보자에 대해 재제청을 요청한 게 몇 주 전이다. 아니나 다를까. 조 대법원장 발언에 청와대는 바로 반응했다. 강유정 청와대 수석대변인은 "신속히 재제청 절차를 진행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헌법 제104조제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관 임명 절차는 헌법의 이 조항에 근거해 진행된다. 조문만 놓고 본다면 제청권, 동의권, 임명권이 각각 동등한 권한이다. 노경필 법원행정처장도 국회 답변에서 "대법원장은 독립적 판단에 따라 제청하고 대통령과 국회는 각각 임명권과 동의권을 행사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 대법원장이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거쳐 노태악 전 대법관 후임으로 손봉기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를 제청한 것은 법적으론 타당하다. 다만 법적 완결성에도 절차적으로 미흡함이 남아 있다는 게 문제다. 그동안 제청권 행사 때 청와대와 대법원은 협의를 해 왔다. 관행이었다. 무조건적 제청권 행사가 초래할 대통령 임명거부라는 파국을 피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대법관의 위상은 일반 시민의 상상 이상이다. 사회·정치적 영향력도 엄청나다. 자체로도 헌법기관이다. 우리나라 최고 법원이자, 기본권 보호와 권력 통제의 최후적 보장기관인 대법원을 구성한다. 이러니 정권을 막론하고 대법관 임명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노무현, 이명박, 윤석열 정부 때도 대법관 제청을 놓고 갈등이 있었다. 서로 자기 색깔에 맞는 인물로 대법관을 구성하려 했다. 그때마다 대통령과 대법원장이 한발씩 양보해 봉합했을 뿐이다. 어느 쪽이 양보했는지는 정권마다 다르다. 상호협의, 그게 관행이었다.

여기서 당연히 의문이 제기된다. 헌법과 관행을 놓고 관행을 우선에 두라는 건 맞나. 그것도 헌법을 두고서 말이다. 관행이 법률보다 우위에 있는 경우를 빈번하게 본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장관 겸직 금지는 법률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관행이 못하게 막고 있을 뿐이다.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였던 용혜인 의원의 사퇴 사태에서도 이 같은 관행의 힘은 작용했다.

노 전 대법관 후임자 제청을 위해 대법관후보추천위를 구성하고 제청까지 걸린 기간은 209일이었다. 청와대는 그 후보자를 거부했다. 7개월간 양측의 정치력은 발휘됐는가. 그걸 묻고 싶다. 대법원이 재제청 요청에 따라 새롭게 추천위를 구성할지, 기존 후보들 중 한명을 다시 제청할지는 미지수다. 그건 전적으로 대법원 판단이다.

물론 이번 사태가 대법관 증원을 둘러싼 행정부와 사법부 간 기싸움이어서 대립 강도가 강하다는 분석에 동의한다. 법원조직법 개정으로 대법관 정원은 기존 14명에서 26명으로 늘어난다. 내년에 대법원장 포함 3명, 2028년 5명, 2029년 6명, 2030년 6명의 대법관이 바뀐다. 이재명 대통령은 임기 중 22명을 새로 임명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대법관 후보 제청 때마다 매번 이렇게 갈등을 재연할 수는 없지 않을까.

관행, 다시 말해 정치적 협의의 필요성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지형, 양극화 등 경제환경도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국제정세 또한 갈라치기가 대세가 되고 있다.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려고만 해서는 갈등이 되풀이되고 시스템은 유지조차 힘들어진다.

법이 모든 걸 규정할 수는 없다. 법과 법 사이 공간은 확실히 있다. 제청권과 임명권은 법으로 명시돼 있지만 정치적 협의로 메워야 할 영역이 중요하다. 그게 국정이고, 정치다. 이 과정에서 꼭 필요한 건 상호존중이다. 오랜 시간 쌓인 관행이 민주주의 유산이다. 선출권력 우위론만을 앞세운다면 관행이 작동하기는 힘들다. 그걸 무시하면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힘들고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된다. 대법관 한명의 공백이 국민의 기본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고민해 봐야 한다. 승자독식이 아닌 승복과 절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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