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억 대작 빠지고 '인증샷 핫플' 된 미술시장… 갈림길에 선 K-아트마켓 [박지현의 아트월드]
[파이낸셜뉴스]"불확실한 경제 상황 속, 시장의 진짜 실력을 가를 진정한 시험대(Test of the market)가 열렸다."
19일 미술계에 따르면 최근 글로벌 미술 매체 아트넷(Artnet)은 9월의 세계 미술 시장을 진단하며 이 같은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졌다. 외신이 주목한 그 냉혹한 시험대는 다름 아닌 '서울'이었다. 글로벌 갤러리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올해로 5회째를 맞은 '프리즈 서울(Frieze Seoul) 2026'과 '키아프(KIAF) 2026'이 남긴 청구서는 복합적이다. 화려한 수사 뒤에 가려진 시장의 민낯은 차가웠다. 수백억 원대의 '하이엔드' 대작들은 자취를 감췄고, 맹목적인 오픈런 대신 이성적인 실속 구매가 자리 잡았다. 외신의 렌즈로 비춰본 한국 미술 시장은 대중화라는 달콤한 과실을 맛본 동시에, 여전히 글로벌 1%의 벽에 갇힌 채 내년 물리적 개최지 분리라는 거대한 딜레마를 마주하고 있다.
지난해 메가 갤러리 하우저앤워스가 마크 브래드포드의 작품을 약 62억 원에 판매하며 샴페인을 터뜨렸던 것과 달리 올해 최고가 타이틀은 국제갤러리가 내놓은 유영국의 1971년작 회화(22억~25억 원)가 차지했다. 하우저앤워스가 야심 차게 들여온 48억 원짜리 조지 콘도 대작은 끝내 주인을 찾지 못했다.
서울을 주 무대로 활동하는 아트 어드바이저 그레이스 민경 박은 아트넷과의 인터뷰에서 "불확실성은 경제 침체 그 자체보다 미술 시장에 더 큰 타격을 준다"고 진단했다. 막판까지 프리즈 진출을 고심했던 가고시안(Gagosian) 등 해외 메이저 갤러리들 역시 초고가 작품 대신, 데미안 허스트의 소품 등 비교적 '핸들링이 용이한' 중저가 작품을 전면에 내세웠다. 환율 하락으로 원화 가치가 상승하는 호재가 있었음에도 글로벌 자본이 한국 시장의 구매력을 보수적으로 평가하며 몸을 사렸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구매력은 하향 조정됐지만 역설적으로 '보는 층'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프리즈 서울은 일찌감치 온라인 '뷰잉룸(Viewing Room)' 제도를 통해 지리적·경제적 장벽을 낮췄고, 통합 티켓 하나로 프리즈와 키아프를 에스컬레이터로 오르내릴 수 있는 코엑스의 '공간적 효율성'은 대중의 유입을 극대화했다.
하지만 미술계 일각에서는 이 같은 폭발적 대중화의 맹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미술 평론가는 "마치 소셜미디어(SNS)의 유명 '핫플레이스'를 순례하듯 페어장을 찾아 획일적인 인증샷과 단편적인 후기만을 남기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해외 갤러리의 빈자리를 40개가 넘는 국내 갤러리들이 대거 메우며 외형을 유지한 이번 행사를 두고 "깊이 있는 컬렉팅 장소가 아닌, 대형 팝업스토어나 테마파크처럼 겉핥기식으로 소비되는 문화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뼈아픈 자성도 흘러나왔다.
가장 큰 위기는 당장 내년에 찾아온다. 코엑스 재개발로 인해 내년 프리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로 자리를 옮기고, 키아프는 코엑스에 남는다. 에스컬레이터 하나로 연결되던 시너지가 물리적인 강남과 강북의 거리로 단절되는 것이다.
프리즈 측은 DDP의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현재 130여 개에 달하는 부스를 내년엔 약 55개 안팎으로 대폭 줄여야 한다. 올해 어떻게든 프리즈에 발을 들여놓으려 사활을 걸었던 한국 갤러리들에게 할당될 자리는 10여 개 남짓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 키아프 역시 '프리즈 곁불 쬐기'라는 오명을 벗고 독자적인 집객력을 증명해야 하는 처절한 생존 게임이 시작됐다.
세계 미술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경제적 규모는 여전히 1% 남짓에 불과하다. 아시아의 허브로 도약했다는 자화자찬을 넘어, 1%의 벽을 깨기 위해서는 일회성 이벤트의 붐업이 아닌 장기적인 생태계 구축이 시급하다.
한편 한국 미술계의 시선은 이제 이달 말(28~30일) 홍콩에서 연이어 열리는 소더비(Sotheby's)와 크리스티(Christie's)의 가을 경매로 쏠려 있다. 글로벌 양대 경매사가 일제히 최근 타계한 거장 쿠사마 야요이의 주요작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소더비는 '무한 그물(Infinity-Nets)'과 1989년작 '호박(Pumpkin)' 등을, 크리스티는 2011년작 'A-Pumpkin(YHP)' 등을 최고 수십억 원대의 추정가로 내놓으며 아시아 시장의 실질적인 구매력을 가늠한다. 특히 이번 홍콩 경매에서 쿠사마의 작품 가격이 반등할 경우, 최근 환율 하락으로 매수 여력이 생긴 국내 경매 시장과 컬렉터들의 투자 심리에도 직접적인 훈풍을 불어넣을 수 있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마틴 시드 매거진(Martin Cid Magazine)은 이번 경매를 두고 "단순한 상업적 이벤트를 넘어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깊이와 범위를 시험하는 자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거품이 걷힌 차가운 현실 속에서 홍콩 경매라는 거대한 자본의 시험대가 아시아 시장에 어떤 온기를 다시 불어넣을지 그 나비효과를 예의주시할 때다.
[email protected] 박지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