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정치

유럽 정치… 중도 사라지고 자유민주주의 위태 [윤재준의 월드뷰]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저성장·불평등에 중도 정당 무너지고… 좌·우 극단 주의 세력 급부상
-프랑스 대선·독일 정국 분열 등 유럽 정치 지형 대변화 예고

프랑스 전역에서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가 폭동과 약탈로 번진 이후 처음으로 통행금지가 시행된 다음날인 지난 20일 파리 시민들이 불에 탄 차량을 바라보고 있다.AP뉴시스
프랑스 전역에서 생활비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가 폭동과 약탈로 번진 이후 처음으로 통행금지가 시행된 다음날인 지난 20일 파리 시민들이 불에 탄 차량을 바라보고 있다.AP뉴시스

[파이낸셜뉴스] 유럽 대륙을 받쳐온 중도 정치의 기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최근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에서 시위와 소요가 확산돼왔다.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최근 유럽에서 저성장과 고물가, 막대한 국가 부채, 청년층의 암울한 미래 전망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극우와 극좌 포퓰리즘 정당을 키우는 동력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실한 교육 예산 문제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된 프랑스의 대규모 소요 사태는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이 같은 현상은 새로울 것이 없는 것으로 청년층과 봉급 생활자 계층에 '더 나은 미래'를 약속했던 자유민주주의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서 절망감과 불신이 수년간 누적되어 온 결과라는 분석이다.

유럽 시민들 사이에서는 중도좌파와 중도우파 등 기존 주류 정당들이 더 이상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고학력 엘리트층이 이끄는 주류 정치권이 서민과 노동자, 청년층과의 접점을 잃었다는 비판이다. 치솟는 재정 적자와 지출, 높은 금리 부담 속에 각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정책적 대응마저 제한되어 있다.

■표심 끌어모으는 극우·극좌 포퓰리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중의 표심은 극단으로 쏠리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극우 성향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RN)'이 차기 대선 여론조사 1위를 달리고 있으며, 극좌 성향 장뤼크 멜랑숑의 '불복하는 프랑스(LFI)'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다. 독일에서도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AfD)'과 좌파당(디린케)으로의 이탈이 가속화되는 양상이다.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 유럽 내 인구 대국 4곳의 주요 선거를 앞두고 극단주의 정당들의 도전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우파 성향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주말 시위 등으로 국면 전환을 모색하는 가운데, 그보다 더 강경한 우파 성향의 로베르토 반나치 전 장군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이미 체코, 핀란드, 슬로바키아, 크로아티아 등지에서는 강경 우파 정당들이 연합정권에 참여하고 있으며, 슬로베니아 정부 역시 강경 우파의 외부 지지에 의존하고 있다. HEC 파리 경영대학원의 알베르토 알레만노 교수는 더 극단적인 우파 세력과의 경쟁으로 인해 기존 정당들마저 정책 입장을 더욱 강경하게 선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민주주의 작동 방식에 대한 대중의 만족도는 급격히 떨어졌다. 올해 조사에서 프랑스 국민의 69%, 스페인의 68%, 이탈리아의 62%가 자국 민주주의에 불만을 표시했다. 오랜 소련 점령기를 거쳐 민주주의를 도입한 폴란드에서도 불만율이 47%에 달했으며, 미국 역시 69%가 불만을 나타냈다.

중도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추락한 원인에 대해 202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런 아세모글루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는 "우리가 민주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유민주주의가 일반 시민, 특히 광범위한 노동자 계층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가 다시 일어서려면 반드시 노동자 계층을 그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한 시위와 소요 사태는 고물가와 고금리로 고통받는 노동자와 연금 수급자들의 분노를 잘 보여준다. 이는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중도우파 정책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전반의 실패를 가리키고 있다. 특히 도시 곳곳에서 벌어진 폭력 사태는 반(反)이민·치안 강화를 주창하는 르펜에게 유리한 정치적 지형을 제공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세모글루 교수는 최근 저서 『자유민주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What Happened to Liberal Democracy?)를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쌓여온 두 가지 핵심 실패 요인을 짚었다.

첫째는 자동화, 글로벌화, 급격한 양극화로 타격을 입은 봉급 노동자 계층에게 '번영의 공유'를 제공하지 못한 점이다. 여기에 인공지능(AI)의 등장으로 인한 고용 불안까지 더해졌다. 아세모글루 교수는 위정자들이 도로와 교육, 의료 등 일상 인프라를 제대로 작동시키는 기본적 책무를 잊었다고 지적했다.

둘째는 '위로부터의 문화 정치'다. 서구권 전반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엘리트층이 전통적 사회주의 및 노동자 정당까지 독점하면서, 기존 지지층이었던 서민들의 우려와 목소리를 계도 대상이나 무시할 만한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갈 곳을 잃은 노동자 표심은 극좌, 그리고 무엇보다 극우 포퓰리즘 정당으로 이동했다. 이는 서구사회의 전통적 가치를 위협하고 중심 정당들의 입지를 축소시키며 의회 민주주의의 작동 자체를 흔들고 있다. 실제로 2024년 영국 총선에서 양대 정당인 노동당과 보수당의 합산 득표율은 지난 100년 내 최저치를 기록했다.

■뿌리째 흔들리는 獨 정치… 유럽 전체 지형 재편 예고
독일 역시 중도 정당의 퇴조와 정치적 파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을 번갈아 이끌어온 중도우파 기독교민주연합(CDU/CSU)과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 등 양대 '국민정당(Volksparteien)'은 현저히 약화했다. 노동자와 청년층이 극우 AfD나 극좌 디린케로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다.

과거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시절 기민련(CDU)은 중도 노선을 강화했으나, 난민 수용 확대와 대중국 수출 감소, 대러시아 긴장 고조 등의 과제 속에서 많은 전통 보수 지지층을 잃었다. 그 공백을 AfD가 메우며 노동자 표심을 흡수했다. 사민당(SPD) 역시 지식인 엘리트층이 정당을 점유하면서 전통 지지층과 멀어지는 길을 걸었다.

최근 독일 여론조사 평균에 따르면 극우 AfD가 약 28%의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으며, 기민/기소 연합이 19.8%, 녹색당이 15%, 사민당이 13.1%, 디린케가 11.3%를 기록하고 있다. 안정적인 중도 연립정부 구성 자체가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다.

불가리아 자유전략센터의 이반 크라스테프 의장은 주요국 선거가 이어지면서 유럽 정치가 분열된 정부 형태의 "대변혁"을 맞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파 연정이 구성되더라도 소수 극우 정당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전체 정치의 극우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내년 봄 치러질 프랑스 대선이 최대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마린 르펜이 승리할 경우 유럽연합(EU) 체제와 유로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그리고 우크라이나 지원책 등 유럽 안보·경제 지형 전반에 엄청난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아세모글루 교수는 포용성을 바탕으로 대중의 분노를 흡수하는 '빅텐트 포퓰리즘'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핵심은 대졸 학력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일자리와 임금 상승, 경력 발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며 "모두가 번영을 공유할 수 있는 정책 과제가 시급하며, 이를 위해 AI 기술을 어떤 방향으로 활용할 것인지가 매우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프랑스 국민연합(RN)의 수장 마린 르펜이 지난 2024년 6월30일(현지시간) 북부 헤닌 보몽에서 총선 1차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AP뉴시스
프랑스 국민연합(RN)의 수장 마린 르펜이 지난 2024년 6월30일(현지시간) 북부 헤닌 보몽에서 총선 1차 투표에 참여하고 있다. AP뉴시스

[email protected] 윤재준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기자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