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건강

[한동하의 본초여담] 죽어서도 왕진을 멈추지 못했던 의원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필신신이란 의원은 새벽부터 수레가 줄을 서도 부귀와 빈천을 가리지 않고 온 순서대로 환자를 보았고, 약값 없이 약을 나눴다. 그는 의술보다 먼저 공평한 마음을 지킨 의원이었다. 챗GPT에 의한 AI생성 이미지.
필신신이란 의원은 새벽부터 수레가 줄을 서도 부귀와 빈천을 가리지 않고 온 순서대로 환자를 보았고, 약값 없이 약을 나눴다. 그는 의술보다 먼저 공평한 마음을 지킨 의원이었다. 챗GPT에 의한 AI생성 이미지.

명나라 말, 산동 신성 땅에 필신신(畢藎臣)이라는 이름난 의원이 살았다.

필신신은 처음부터 의원이 되려던 사람은 아니었다. 젊어서는 글 읽기를 좋아해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집안이 너무 가난했다. 스승에게 드릴 작은 예물조차 마련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결국 글공부를 접고 의술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당시 명의로 이름난 유남천(劉南川)의 문하에서 의술을 배웠다. 타고난 재능에 부단한 노력이 더해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실력이 널리 알려졌다. 마침내 황실 의료기관인 태의원의 이목(吏目)이라는 벼슬까지 받았다.

그는 특히 상한(傷寒, 외감병)과 두진(痘疹, 천연두와 발진성 질환)에 밝았다. 환자의 맥을 짚고 병세를 살피면 살고 죽을지를 거의 틀리지 않고 알아맞혔다. 또한 환자가 사는 지역과 체질의 강약, 계절에 따른 기후의 변화까지 두루 살펴 약을 처방했다. 그래서 한두 제만으로도 병을 낫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청성의 한 현령은 배가 심하게 부풀어 며칠 동안 음식조차 먹지 못했는데, 필신신이 건넨 약 한 숟가락에 병이 나았다.

하지만 필신신이 사람들에게 존경받은 까닭은 뛰어난 의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새벽이면 그의 집 앞에는 환자를 태운 수레와 말이 줄을 이었다. 높은 벼슬아치도 있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난한 백성도 있었다. 그러나 필신신은 누구든 먼저 온 순서대로 진료했다. 벼슬이 높다고 먼저 들이지 않았고, 가난하다고 뒤로 미루지도 않았다. 때로는 약을 문간에 걸어두고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도록 했으며, 약값도 받지 않았다.

그의 의술과 인품을 높이 산 사람들은 필신신을 극진히 대접했다. 성품이 엄하기로 소문난 태복 왕형(王瀠)조차 그가 찾아오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어느 날 필신신이 먼 곳으로 왕진을 다녀오니 집안이 온통 울음바다였다. 늙은 아버지가 갑자기 위독해진 것이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머리맡에 둘러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한 모습에 모두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필신신은 서둘러 아버지 곁에 앉아 진맥을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살아나실 것입니다." 가족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말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필신신은 곧바로 약을 지어 올렸다. 그러자 약 한 제를 복용한 아버지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피를 몇 되나 쏟아낸 것이다. 가족들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병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목숨을 재촉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피를 쏟아낸 아버지가 오히려 정신을 차리더니 병이 씻은 듯 나은 것이다.

그렇다면 필신신은 아버지의 맥에서 무엇을 알아차렸기에 그토록 자신 있게 살릴 수 있다고 했을까.

한의학 고전인 <상한론(傷寒論)>에는 열이 아랫배에 맺혀 사람이 미친 듯하더라도 피가 저절로 나오면 낫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는 열과 피가 뒤엉켜 뭉친 축혈증(蓄血證)을 설명한 것으로, 이러한 병증에는 어혈을 몰아내는 약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약재가 바로 대황(大黃)이다. 대황은 맛이 쓰고 성질이 차며, 뭉친 어혈과 열을 몰아내는 작용이 강해 '장군(將軍)'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묵은 것을 밀어내고 새것을 들인다는 '추진치신(推陳致新)'이라는 말도 대황의 효능을 설명한다.

물론 필신신이 실제로 어떤 약을 썼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상한 치료에 밝았던 그가 아버지의 병을 축혈증으로 판단했다면 대황이 들어간 처방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가족들의 눈에는 쏟아진 피가 죽음의 징조처럼 보였겠지만, 필신신의 눈에는 병이 풀리는 징조였던 것이다.

필신신은 1642년, 청나라 군대가 고향의 성을 함락했을 때 국난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의 나이 마흔여덟이었다.

필신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아들과 아내, 딸이 병에 걸리면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자녀들이 이질이나 학질, 종기와 두창 등을 앓을 때마다 꿈속에 필신신이 나타나 약을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이 약을 먹으면 며칠 뒤에는 나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가족들은 그가 일러준 날에 병이 나았다. 필신신은 살아서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돌보더니, 죽어서도 가족의 병을 걱정하며 약을 지어주었다.

필신신은 죽어서도 왕진을 멈추지 않았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의술명류열전> 按《新城縣志》:畢藎臣, 字致吾, 贈副都御史理五世孫, 霍州知州成元孫也. 渾厚有古君子風, 少喜讀書, 家貧不能俱脡脯, 乃去而學岐黃. 从游名醫劉南川之門, 久之, 名噪遠近, 授太醫院吏目冠帶. 其於病也, 辨南北, 審強弱, 察四時陰陽氣候, 投一二劑無不霍然. 其最精者, 尤在傷寒ㆍ痘疹, 診視立辨生死, 百不爽一, 全活無算. 晨起, 雖車騎盈門, 必次第而至, 不先富貴, 不遺貧賤. 時時懸藥施人, 不索其直. 益都王太僕瀠性嚴重, 藎臣至, 躬自執爨進食, 儼如大賓. 青城令某病脹, 絕粒數日, 藎臣至, 一匕而愈. 邑王大司馬建牙宣大, 每病數千里迎迓, 非藎臣不他任也. 一日遠出, 父病亟. 家人環泣, 藎臣急診脈曰:"無慮也." 才一劑, 血出數升, 病良已. 其術奇妙類如此. 崇禎壬午, 城陷殉難, 年四十八. 藎臣歿, 靈爽如在. 子元宰及其妻女病痢瘧, 或病癰痿, 或痘疔, 屢夢藎臣投以藥, 且示以某日當痊, 皆如言嚮應, 異哉! 知府李鴻霔撰傳. (《신성현지》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필신신은 자가 치오로서, 부도어사에 증직된 리의 오세손이며 곽주의 지주를 지낸 성의 현손이다. 온화하고 너그러워 옛 군자의 풍모가 있었고 젊어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정포를 장만하지 못하자 그만두고 기황을 배웠다. 명의 유남천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오래 지나자 원근에 명성이 자자해져서 태의원이목에 제수되고 관대를 하사받았다. 병을 볼 때면 지리적 환경을 분별하고 체질의 강약을 살피며 계절에 따른 음양의 기후를 헤아렸으므로 한두 제만 투여해도 씻은 듯 낫지 않음이 없었다. 가장 정묘했던 분야는 상한과 두진이었으니, 진찰하여 즉시 생사를 판정하면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으며 온전히 살려낸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수레와 말이 문에 가득했으나 반드시 차례대로 진료하여, 부귀하다 해서 먼저 보거나 빈천하다 해서 내버려두지 않았다. 계절마다 약을 준비하여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약값을 요구하지 않았다. 익도의 태복인 왕형은 성품이 몹시 엄했으나 필신신이 도착하자 몸소 음식을 만들어 식사를 대접했으며 큰손님처럼 정중하게 대했다. 청성의 현령 아무개는 창병에 걸려 며칠 동안 곡기를 끊었는데, 필신신이 가서 약 한 숟가락으로 낫게 했다. 읍 출신의 대사마인 왕건은 아선이 심했는데, 아플 때마다 수천 리 밖에서 초청했으며 필신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맡기지 않았다. 하루는 멀리 출타했을 때 부친이 병들어 위독했다. 집안사람들은 둘러서서 울었으나 필신신은 급히 진맥하더니 "걱정 없다."고 했으며, 겨우 한 제를 복용하자 피가 몇 승 나오고는 병이 완전히 나았다. 그 의술이 신묘하기가 대개 이와 같았다. 숭정 연간 임오년에 성이 함락될 때 국난에 목숨을 바치니, 향년 마흔여덟이었다. 필신신은 죽었으나 영혼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아들 원재와 아내, 딸이 이질이나 학질에 걸리기도 하고 두창이나 정창을 앓기도 했는데, 언제나 꿈에서 필신신이 약을 투여하고는 어느 날에 나을 것이라고 일러주면 모두 그 말대로 메아리처럼 들어맞았으니, 신기하도다! 지부 이홍주가 전기를 지었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email protected]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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