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서 한 장으로 분쟁이 끝날까 [원희영 변호사의 사건이 된 일상]
[파이낸셜뉴스] "합의했으니까 이제 문제 될 일은 없겠지?"
다툼 끝에 합의금을 주고받았다고 하자. 돈을 보낸 사람은 서명된 합의서를 챙기며 한숨을 돌린다. 그런데 얼마 뒤 추가로 치료비를 달라는 연락이 온다. "합의금에 다 포함된 것 아니냐"고 묻자, "앞으로 나올 치료비까지 포기한 적은 없다"는 답이 돌아온다.
"민형사상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선처만 해줄 생각으로 이런 문구에 서명했다가 나머지 손해배상청구까지 포기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치료 중이라면 이미 쓴 치료비와 앞으로 들 치료비 중 어디까지 합의금에 포함했는지가 쟁점이다. 앞으로 들 치료비를 별도로 청구하기로 했다면 그 약정도 합의서에 남긴다.
여러 사건 중 하나만 합의할 때는 사건번호와 분쟁 내용을 특정하고, 나머지 청구는 합의에서 제외한다고 적는다. 막연히 '일체의 이의'를 포기한다고 쓰면 다른 사건의 청구권까지 다투게 될 수 있다.
단순폭행 같은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가 제1심 판결 선고 전까지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유효하게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하면 처벌할 수 없다. 반의사불벌죄나 친고죄가 아닌 사기·횡령 등의 사건에서도 피해자와의 합의와 피해 회복은 중요한 양형참작사유다. 합의만으로 수사나 재판이 끝나거나 불기소·집행유예가 보장되지는 않지만, 형을 정할 때 유리하게 반영된다.
"합의서부터 써주시면 돈은 다음 달까지 드리겠습니다."
반의사불벌죄에서 수사기관이나 법원에 유효하게 표시한 처벌불원 의사는 합의금을 못 받았다는 이유로 되돌릴 수 없다. 처벌불원서는 보관하고 합의서만 먼저 건네도 안심할 수 없다. 그 합의서에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썼다면 상대방이 이를 제출해 처벌불원 의사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액을 받은 뒤 처벌불원서를 주기로 했다면, 지급 약정에는 금액·지급일과 함께 "합의금 전액을 받은 뒤 처벌불원서를 교부한다"고 적는다. 현재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문구나, 받지도 않은 돈을 '전액 수령했다'는 문구는 넣지 않는다.
분할 지급에는 각 지급일과 금액, 연체 시 잔액을 한꺼번에 청구할 수 있는 조건을 둔다. 처벌불원서를 먼저 주기로 했다면 남은 합의금 지급 약정을 채무자의 강제집행 승낙이 담긴 공정증서로 작성할 수 있다. 돈을 못 받았을 때 별도 소송 없이 강제집행할 수 있지만, 집행할 재산이 없다면 회수는 어렵다.
필자가 맡았던 사건에서는 수억원의 합의금을 받은 사람이 공소시효 만료 직전에 고소했다. 돈을 지급한 사람은 끝난 줄 알았던 사건의 피의자가 돼 수사를 받았다.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부제소합의가 유효하면 그에 어긋난 소송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고소하지 않겠다는 약정만으로 고소권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친고죄나 반의사불벌죄가 아닌 사건에서는 합의 뒤에도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까지 피해자가 고소할 수 있다.
공소시효가 10년인 범죄를 두고 1억원에 합의했는데, 상대방이 9년 넘게 돈을 쓰다가 시효 만료 직전에 고소했다고 하자. 약속을 어긴 대가가 원금 반환뿐이라면, 상대방은 그동안 돈을 사용한 이익을 그대로 누린다.
그래서 필자는 부제소합의나 고소하지 않겠다는 약정에 위약벌 조항을 함께 두는 편을 권한다. 위약벌은 약속을 어긴 대가로 지급하는 제재금이다. 위반 행위와 금액을 정하고, 합의금 반환이나 손해배상과 별도로 지급한다는 취지를 명시한다. 합의금을 받는 쪽에서도 연락이나 접근을 금지하는 약정에 위약벌을 붙일 수 있다.
위약벌이 있어도 고소 가능성은 남는다. 피해자가 위약벌을 물고, 별도의 반환 약정이 있다면 합의금까지 돌려주겠다는 생각으로 고소할 수도 있다. 고소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약정이나 지나치게 무거운 위약벌은 무효가 될 수 있다.
그래도 필자는 합의를 해두는 편이 낫다고 본다. 합의금을 받고 분쟁을 끝내기로 했다가 고소하면 수사기관이나 법원도 합의를 번복한 경위와 고소 동기를 살필 수 있다. 별다른 사정 변화 없이 추가 금전까지 요구했다면 고소를 압박 수단으로 삼은 것은 아닌지 의심받을 수 있다. 피고소인은 합의서와 지급 내역을 방어자료로 낼 수 있고, 실제로 피해를 회복한 사실은 양형에서도 참작된다.
합의서 초안은 AI로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상대방이 사과부터 요구하는데 액수만 높여 제안하면 합의가 성사되기 어렵다. 변호사는 합의하지 못했을 때 예상되는 처분과 배상 책임을 설명하고, 의뢰인과 함께 양보할 조건을 정한다.
당사자는 동의했는데 돈을 마련할 가족이 반대하거나, 공동책임자들끼리 부담 비율을 두고 다투기도 한다. 이런 사건에서는 당사자끼리 금액에 동의한 뒤에도 누가 얼마를 낼지를 놓고 협상이 이어진다.
금액과 조건을 이미 약속한 뒤 합의서만 검토받으면, 불리한 조항을 발견해도 상대방이 수정을 거절할 수 있다. 이해당사자가 많고 감정이 깊이 얽힌 사건일수록 첫 조건을 제안하기 전부터 변호사와 협상안을 짜는 편이 낫다.
[필자 소개] 원희영 변호사는 파이낸셜뉴스 기자 출신으로, 현재 법무법인 YK에서 형사사건을 담당하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정보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평범한 일상이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살피고, 사건의 결과를 좌우하는 핵심 쟁점과 실질적인 대응 방법을 전한다.
[email protected] 이환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