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視角] 키보드의 '모두를 위한 디자인'
지식노동자의 손끝이 하루에도 수없이 닿는 도구가 있다. 바로 키보드다. 스마트폰 화면의 자판까지 생각하면 키보드는 모두의 일상 도구다. 이 입력장치가 완벽한 건 아니다. 여전히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키보드도 달라질 때가 된 걸까.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가 한국을 깜짝 방문해 삼성 경영진에게 건넨 선물이 눈길을 끄는 이유다. 글쇠가 단 13개인 소형 키보드 '코덱스 마이크로'다. 컴퓨터에 말로 지시하고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새로운 기기의 등장이다.
입력기술 경쟁은 이미 달아올랐다. 눈앞의 장면을 인식하는 AI 안경, 음성으로 명령을 내리는 AI 이어폰, 손목의 미세한 근육 신호로 기기를 조작하는 센서밴드까지 시장에 선보였다. 손가락으로 두드리던 입력방식이 목소리와 몸짓으로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놓치지 말아야 할 원칙이 있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둔 설계 철학이다.
대표적인 사람 중심의 설계 정신은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모두를 위한 디자인'이다. 장애 유무와 나이, 신체 조건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이 제품과 환경을 이용하도록 만들자는 설계 철학이다. 장애인과 고령자의 불편을 덜기 위한 기술적 시도가 더 많은 사람의 편의성을 높이는 디딤돌이 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키보드는 지난 150년간 다양한 사용자의 편의를 반영하며 발전했다. 키보드의 초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08년 이탈리아의 한 발명 사례가 등장한다. 시각장애가 있는 카롤리나 판토니 백작부인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편지를 쓸 수 있도록 타자 장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초기 타자기 발명에 장애인의 글쓰기 제약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타자기는 상업화와 대중화를 거쳐 컴퓨터의 입력장치로 발전했다. 익숙한 키보드에도 사용자를 배려한 설계가 숨어 있다. F와 J 글쇠에는 작은 돌기가 있다. 두 집게손가락으로 위치를 확인하면 자판을 보지 않고도 타자를 칠 수 있다. 숫자 키패드의 5에도 비슷한 표시가 있다. 시각장애인에게도 유용한 촉각장치다. 대문자 입력 상태를 알려주는 표시등이나 여러 키를 동시에 누르기 어려운 사람을 돕는 고정키 기능도 접근성을 배려한 장치다.
키보드의 약점도 적지 않다. 장시간 반복적인 입력 작업은 손목과 손가락에 부담을 준다. 손목터널증후군이나 건초염 같은 질환을 둘러싼 우려도 제기된다. 특히 오늘날 키보드의 표준인 QWERTY 배열은 표준화라는 장점의 이면에 불편함도 안고 있다. 알파벳순도 아닌 배열 때문에 익히는 과정이 낯설지만, 익숙해진 이용자가 워낙 많아 다른 대안이 등장해도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 과거의 선택이 미래의 선택을 제약하는 경로 의존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키보드 발전에 미친 유니버설 디자인의 영향력은 되새길 만하다. 더 많은 사람에게 사용 기회를 넓히자는 가치는 여러 기술 개발에 참고할 원칙으로 정립됐다. 199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연구진이 정리한 7대 원칙이다. 주요 내용은 공평한 사용, 사용의 유연성, 단순하고 직관적인 사용, 인지 가능한 정보, 오류에 대한 포용, 적은 신체적 노력, 접근과 사용에 적절한 크기와 공간 등이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조건에 맞게 제품과 환경을 이용하도록 만들자는 취지다.
그렇다면 이 정신은 AI 시대의 새로운 입력장치에도 영향을 미칠까. 사람이 기계에 직접 정보를 입력하고 명령을 내리던 일 처리는 AI에 일을 맡기고 그 과정을 감독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 입력장치의 역할이 달라지는 만큼 설계기준도 진화할 시점이다. 기존 유니버설 디자인 정신을 AI의 실행과 통제 영역까지 확장해야 한다. '접근과 활용의 보편화'가 주된 정신이었다면 '통제의 보편화'로 확장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