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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임권택 100번째 영화 ‘천년학’찍다



【장흥(전남)=정순민기자】지난 11일 새벽 5시. 희뿌연 서울의 안개를 뚫고 2대의 버스가 호남고속도로로 들어섰다. 전남 장흥에서 첫 촬영하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을 취재하기 위해 집을 나선 기자들은 속절없이 쏟아지는 잠에 흠뻑 빠져들었다.

새벽 5시에 서울을 출발해 당일 밤 12시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무리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자들이 버스에 올라탄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생애 100번째 영화를 찍는 거장 임권택을 비롯해 원작자 겸 시나리오 집필자인 소설가 이청준, 촬영감독 정일성, 국악인 김덕수와 안숙선, 주연을 맡은 오정해와 조재현, 그리고 무엇보다 소설과 영화의 무대인 선학동이 그곳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전 11시30분. 원작자인 이청준의 고향이기도 한 전남 장흥군 회진면 세트장에서 길놀이를 겸한 고사가 시작됐다. 국악인 김덕수의 선창으로 북과 꽹과리가 울리자 회진면 세트장 주변은 금세 잔치집처럼 떠들썩해졌다. 서울서 온 취재진과 구경 나온 마을사람들이 뒤엉킨 가운데 돼지머리 앞에는 ‘액운을 쫓고 행운을 맞게 해달라’는 간절한 소원과 각자의 정성이 담긴 하얀 돈봉투가 쌓여갔다.

오후 1시30분. 읍내에 있는 장흥문화예술회관에서 ‘천년학’ 제작발표회를 겸한 기자회견이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질문은 100번째 영화에 임하는 임권택 감독에게로 집중됐다.

―벌써 100번째 영화다.

▲100번째라고 해서 갑자기 실력이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안팎에서 자꾸 100번째 영화라는 사실을 상기키고 있어 부담이 되는게 사실이다. 애초에 100번째 영화를 쉽고 가볍게 지나가려고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다. 이청준의 남도사람 연작 중 ‘서편제’와 ‘소리의 빛’은 영화 ‘서편제’에 담았고 ‘천년학’은 그 마지막 이야기인 ‘선학동 나그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서편제’가 나온지 13년만에 속편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천년학’은 ‘서편제’의 속편이면서 속편이 아니다. ‘서편제’ 그 이후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서편제’의 아류를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서편제’가 소리를 영상으로 표현하는데 주안점을 둔 판소리 영화였다면, ‘천년학’은 아버지 유봉을 버리고 떠났던 동호와 소리꾼인 의붓누이 송화의 가슴아픈 사랑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지금 이 나이까지 기피해왔던 사랑 이야기를 이번에 한번 해 볼 참이다. 이젠 사랑이 무엇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사랑을 이야기할 나이도 됐다.(웃음)

―‘서편제’ ‘춘향뎐’ 등을 통해 판소리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이번에도 우리 가락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나.

▲소리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판소리가 효과음 정도로만 사용될 것이다. ‘서편제’에서와 달리 판소리가 후면으로 물러나고 그 자리에 현대음악이 들어오게 된다. 서양음악과 한국의 소리를 절묘하게 융합해온 재일동포 작곡가 양방언씨의 음악을 사용할까 생각 중이다.

―제작·투자사와 주연배우가 바뀌는 등 유난히 곡절이 많았는데.

▲막연하고 막막했던 일들이 뜻밖에 잘 풀려 기대가 크다. 스타 연기자를 캐스팅하지 않아 투자가 안되는 상황이 빚어지면서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그런 와중에 조재현씨를 만나게 돼 다행이다. 오래전부터 조재현이라는 배우와 함께 작업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이번에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조재현씨 쪽에서 어떤 배역이든 좋으니 이번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와 이왕이면 주인공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조재현씨 외에 또 누가 출연하나.

―먼저 이 작품이 ‘서편제’와 물려들어가는 부분이 있어서 전편에 출연했던 오정해를 다시 소리꾼 송화 역에 캐스팅했고,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송화와 동호를 연결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될 앵금이 역으로 신지수가 합류했다. 이것 역시 신지수가 강력한 출연 의사를 밝혀 한 번 만나고 바로 캐스팅을 결정했다. 그런데 동호와 송화의 의붓아버지인 유봉 역을 하기로 했던 김명곤씨가 갑자기 문화관광부 장관에 내정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유봉 역은 더 시간을 두고 찾아 볼 생각이다.

―‘천년학’의 개봉 예정일이 내년 5월인데 칸국제영화제 출품도 고려하고 있나.

▲상황이 되면 출품하려고 한다. 상을 꼭 받아야 되겠다는 건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와 우리의 영화를 널리 알리고 싶은 생각에서다. 영화를 통해 판소리가 됐든 우리 이야기가 됐든 우리의 것을 세계에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오후 4시30분. 드디어 ‘천년학’의 첫 촬영이 시작됐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있던 조재현이 분장을 하고 나타나자 임권택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진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첫 촬영 장면은 40대 중반에 들어선 동호(조재현)가 30여년만에 송화(오정해)의 행방을 찾아 옛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회진포구를 찾는 장면. 오랜 세월을 견디며 묵묵히 거기 서 있었을 듯한 키 큰 소나무 너머로 낡은 주막이 한 채 덩그러니 놓여있고 사랑하는 이가 머물렀을 수도 있는 그곳을 향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는 한 남자의 뒷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임권택 감독이 큰 소리로 “오케이”를 외쳤다. 몇 차례 NG 끝에 OK 사인이 떨어지자 숨죽여가며 이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이제 서울서 온 기자들은 취재수첩을 접고 천리길(전남 장흥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400여㎞, 1000리란다)을 되밟아 올라가야 한다.

/ jsm64@fnnews.com

■사진설명=임권택 감독이 지난 11일 전남 장흥에서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촬영을 시작했다. 임감독은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이번 작품은 '서편제'의 속편이면서 속편이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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