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지하 창고에 플래카드가 많이 쌓여있어요. 철조망도 있고 각종 시위용 피켓들도 있지요.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인데 2년 전엔 왜 그랬었나 싶을 정도예요. 금방 바뀌어버렸습니다.”
서울 송파구 오금동 현대백조아파트 전승재 관리소장은 2년전의 삭막한 광경을 떠올리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현대백조아파트는 2개동 200가구 규모로 2개동 중 1개동엔 분양 아파트와 임대아파트가 섞여 있다. 흔히 일반 임대아파트는 임대주민들과 분양 주민들이 엄격하게 동간 구분돼 있지만 이 아파트는 양측 주민들이 서로 이웃해 얼굴을 마주 보며 같이 지내도록 돼 있다.
이른바 정부가 추진 중인 ‘소셜믹스(Social Mix)’ 개념이 잘 도입된 아파트인 셈. 소셜믹스는 분양 아파트 주민과 임대주택들이 한데 어우려져 사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아파트는 지난 97년 입주 후 2004년까지 무려 9년간이나 노골적으로 반목하며 지냈다. 상대방을 비방하는 현수막을 내거는 건 예사였고 툭하면 관리사무소에 찾아가 상대 주민들을 성토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옥이 따로 없었던 셈이다.
2년 전 SH공사가 직영관리하면서 변화의 전기가 마련됐다. SH공사가 나서서 갈등의 핵심원인이었던 관리비 문제를 풀었고 이후 쌍방간 갈등이 급속하게 해소되면서 양측은 ‘우리가 언제 다퉜었나’ 싶을 정도로 평화를 회복했다.
임대아파트는 소셜믹스형이 이상형이지만 그동안 임대주민과 분양 주민간 반목이 워낙 심해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백조아파트 사례에서 보듯 최근 임대주택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직영관리 도입 후 ‘철조망’, ‘현수막’ 사라져
현대백조아파트 102동 임대아파트 입주민 송현자씨(44·가명)는 “지난 9년 동안 일반 입주민 위주로 아파트 관리가 이루어져 임대 주민들의 불만이 매우 컸다”면서 “일반 주민들이 편의시설 고급화 등 관리비가 추가되는 결정을 내리면 임대 주민들은 부담이 커져 반대하거나 찬성하더라도 관리비를 연체하는 경우가 생겨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SH공사는 이같은 점에 착안해 지난 2005년부터 임대 주민들을 따로 관리하는 직영시스템을 도입했다. 때가 되면 해당 가구의 장판 등 내구재를 교체해주고 일반 아파트 주민과 같이 쓰는 공동시설을 유지·보수할 때는 서울시에서 받은 예산을 일부 전용해서 지원했다.
그후 공동시설 관리에 대해 분양 아파트 주민과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의견 차이가 빠르게 좁혀졌다. 임차인 대표와 분양입주민 대표가 만나는 일도 잦아졌다. 그렇게 2년이 지나면서 현수막과 철조망들은 지하실 창고로 모두 들어가게 된 것이다.
SH공사 관계자는 “그동안 임대아파트는 관리부실로 인한 슬럼화 우려나 임대·분양 주민 간 반목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돼 왔다”면서 “그러나 직영체제를 도입해 이같은 문제를 해결했으며 주택법상 임대·일반 혼합주택에 대해 관리체계를 SH공사 직영으로 고정하는 방안을 건설교통부에 꾸준히 건의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임대아파트, 커뮤니티중심 생동감 있는 단지로 변모
단독 임대아파트 역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교류가 거의 없는 ‘침묵의 주거단지’에서 커뮤니티 활동이 왕성한 생동감 있는 단지로 바뀌고 있다. 서울 성동구 금호대우아파트가 그 단적인 예다.
이 아파트는 지난 2003년부터 매년 ‘정월 대보름 민속놀이 행사’를 개최해왔다. 처음엔 교류가 없어 호응이 적었지만 지난 11일 행사에는 508가구 중 400여가구가 참여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행사를 기반으로 부녀회는 ‘사랑의 떡’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설이나 추석 등 명절이 되면 입주민들을 대상으로 떡을 판매해 수익금을 인근 지역의 어려운 주민들을 돕는데 쓰고 있다. 다양한 친목활동뿐 아니라 봉사활동 참가도 적극적이다.
김현숙 동장은 “정월대보름행사 등 각종 행사를 우연히 참관한 이웃 아파트 주민들도 우리 단지가 임대아파트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면서 “다른 지역 아파트 주민들이 우리 단지 커뮤니티 운영방식을 모범사례로 삼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또 다른 자랑거리를 갖고 있다. 3년 후 출범할 예정인 영리사업단체가 그것이다. 아파트 입주민들은 지난해 노동부와 협의해 퇴직 입주민 50명을 모아 ‘위생관리단’을 발족했다. 현재 노동부에서 1인당 월 77만원의 급여를 받고 단지내 장애인이나 독거노인의 주거시설을 청소하고 새단장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임대 주민들이 만든 주민자치협의회에서 수시로 아이디어를 낸 결과다.
김종수 금호대우아파트 전 회장은 “입주민 중 수입이 부정기적인 사람들을 모아 정기적인 수입을 내게 하는 한편, 단지내 장애인과 독거노인 등 불편한 입주민들을 대상으로 위생사업을 벌인다”면서 “지금은 우리 단지를 중심으로 하지만 앞으로 주변 단지를 중심으로 확대해 3년 후 하나의 소기업체로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격차 인정하고 관리비 등 틈새 메워줘야”
올해 혼합임대아파트를 본격적으로 공급하는 SH공사는 원활한 소셜믹스를 위해 두 가지 과제를 추진 중이다. 바로 임대주민들의 커뮤니티 활동을 성숙시키는 한편, 두 집단 간의 조직적 융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임대주민과 분양 주민들의 격차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 틈새를 메워주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주택도시연구원 이미윤 박사는 “임대 주민과 분양 주민이 서로 어우러져 살기 위해서는 소득이나 생활수준 격차를 인정하는 동시에 보완해주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면서 “분양과 임대를 같이 섞을 경우 비슷한 평형끼리 묶거나 임대 주민의 관리비를 일정량 국비로 지원해주는 방법 등이 그 해법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cameye@fnnews.com 김성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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