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로운 땅. 인도까지 바닷길이 열렸다. 하루라도 빨리 인도에 닿아 무역권을 따야 한다. 인도 진출에 혈안이 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도 이미 출항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누가 우리를 이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세계 최고의 항해 실력과 부를 가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다.
빛 바랜 종이가 있다.
17세기, 세계 무역권을 독점, 막강한 부를 누렸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발행한 증권이다. 당시 신항로 개척으로 동양과 신대륙에서 얻은 부가 국력의 중요한 원천이 되면서 유럽 각국은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해외 진출에 앞다퉈 나섰다. 특히 네덜란드는 1602년 가장 막강한 동인도회사를 설립,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를 물리치고 동방 교역 독점권을 가졌다.
동인도회사는 아시아·인도로부터 금·은, 광물, 식량 등을 헐값에 유럽으로 가져 갔는데 주로 큰 범선을 이용했다. 하지만 긴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 비싼 배가 난파되는 일이 자주 발생하자 여러 사람이 배 한 척을 동시에 소유토록 해 손해를 분산하고 이익을 나눠 갖도록 했다. 그때 각 주주에게 주인이라는 증서로 나눠 주던 것이 이 주권, 오늘날 주식회사의 기원이 됐다.
#2. 큰일이다. 어제 옆동네 돌쇠를 몇 대 친다는 게 그만 상처를 크게 입혔나 보다. 너무 화가 나서 감정을 잃었던 게 사실이다. 내가 일찌감치 점찍은 순이에게 장가들겠다고 설치지만 않았어도 주먹질까지는 가지 않았을 게다. 저녁에 우리 싸움을 두고 마을 회의가 열린다고 한다. 벌금형이 내려질 게 뻔하다.
이번에는 한지다. 먹으로 쓴 한자들이 세로로 이어지고 한지 가운데는 커다란 손이 그려져 있다. 왼손을 한지 위에 두고 오른손에 붓을 잡고 손가락 끝 선을 따라 본뜬 듯 하다.
마을 여자를 놓고 두 남자간 큰 다툼이 있어 한쪽이 상해를 입었다. 마을에서는 회의가 열렸고 가해자가 피해자에 사과하고 위자료로 185냥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 한지는 가해자가 그 판결을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 담긴 증서다.
조선 말기에 사용되던 수표 방식이다. 개인간 약속한 내용을 담고 서명을 하는 대신 손바닥을 그리기도 했는데 이를 ‘수장’이라고 했다. 보통 지위가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던 방식이다. 수장이 발전해 오늘날 금융기관에서 발행하는 ‘수표’로 진화했다.
증권에는 여러가지 사연이 담겼다. 흥미진진한 역사의 한 장면을 담고 있기도 하고 수 세기 전 누군가의 억울함과 슬픔 또는 기쁨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증권 박물관에서 증권은 결코 따분하고 어려운 경제 용어가 아니다. 수 세기를 거쳐온 그들의 사연을 엿보는 동안 세계 경제의 과거와 현재를 생생히 전해주는 살아 있는 역사가 된다.
경기도 일산에 있는 증권 박물관은 현재 리모델링을 위해 내부 수리 중이다. 오는 2월 18일 새롭게 문을 여는 박물관을 미리 찾아가 봤다.
세계 최초 증권박물관이 될 수도 있었다. 4년 전 증권예탁결제원이 창립 30주년을 맞아 증권박물관 개관을 계획할 때만 해도 전세계 어느 곳에도 증권박물관은 없었다.
8년의 준비 끝에 2004년 3월 세계 첫 박물관을 자랑스레 연 직후 스위스에 이미 증권박물관이 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스위스 증권박물관이 문을 연 것은 2004년 2월. 정확히 한달 전이었다.
간발의 차로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을 뺏기긴 했지만 증권예탁결제원은 스위스 증권박물관과 중요한 자료를 공유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경기 일산 증권박물관은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뉜다. 증권의 역사, 증권의 이해, 증권 갤러리, 그리고 증권 체험코너다.
■Zone 1-기원전에도 증권은 있었다
첫번째 구역에서는 세계 증권의 역사와 우리나라 증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기원 전 33세기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쐐기문자를 사용, 점토판에 누구에게 양을 몇 마리 받았다는 영수증과 누구의 땅을 얼마에 산다는 계약서를 새겨 보관했다. 계약서에는 증인과 공증인 이름을 기록했고 계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어떻게 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이것이 증권의 기원이다.
주식회사의 기원은 로마제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는 국가기능 가운데 조세징수에서 신전 건립까지 상당 부분을 퍼블리카니라는 조직에 아웃소싱했다. 퍼블리카니는 주식회사처럼 소유권이 다수에 분산된 법인체로 재무제표를 공시하고 주주총회도 정기적으로 개최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는 9세기 말, 해인사가 토지를 구입할 때 만든 전권이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 증권이다. 전권은 토지 소유자가 토지를 파는 사유와 토지면적, 매매가격 등을 표시해 사는 사람에게 넘겨준 문서를 말한다. 주식이 처음 등장한 것은 구한말인 1899년, 천일은행이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되면서부터다. 증권시장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공식적으로 열렸다.
■Zone 2-증권시장에 대해 배워봐요
두번째 '증권의 이해' 코너에서는 증권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초등학생 눈높이에서 여러가지 개념을 설명하고 다양한 증권 견본을 보여주며 이해를 높인다.
우리나라 증권은 위조 증권이 너무 많이 나와 가로 20㎝, 세로 11㎝로 조폐공사에서 일괄된 크기와 형태로 찍도록 정해졌다. 1주, 5주, 10주, 50주, 100주, 500주, 1000주, 1만주까지 총 8가지 권종으로 색을 모두 다르게 해 구분한다.
증시에 대한 설명은 만화 캐릭터가 해준다. TV화면에 박사님과 여자 어린이가 나타나 대화를 주고 받으며 증시란 무엇인가, 주식시세표 보는 방법 등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 종합주가지수, 환율, 금리, 각종 경제뉴스들을 실시간 검색할 수 있어 이해를 돕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세계 증시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큰 세계 지도 위에 TV화면이 왔다갔다 하면서 영국과 미국, 유럽, 홍콩 등을 넘나든다. TV가 멈출 때마다 박사와 여자 어린이가 각국 증시에 대해 설명한다.
■Zone3-사연 많은 증권들
3번째 구역은 '증권 갤러리'다. 일제 강점기시대 증권, 북한의 증권, 세계 각국 증권. 세계 유명 기업 증권과 산업 테마별 증권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증권들엔 갖가지 사연이 담겼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증권에선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일제가 조선의 토지와 자원 수탈을 위해 새운 동양척식주식회사 주권과 대동아전쟁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전시보국채권 등에서 일제강점기 '약탈과 치욕의 경제사'를 읽을 수 있다.
북한 증권들도 볼 수 있다. 인민경제발전채권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남한에서 판매했던 채권이다. 당시에 채권을 산 후 이제까지 보유하고 있던 한 할아버지에 의해 기부된 것. 예탁결제원 증권박물관 노세진 학예사는 "이 채권을 갖고 있던 할아버지가 혹시 연좌제로 피해를 당할까봐 무서워서 내놓지 않겠다고 해 설득하느라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현재 북한에서 발행되는 인민생활공채도 볼 수 있다. 500원, 1000원, 5000원권인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다. 북한에서는 이 채권이 로또처럼 사용된다. 채권상에 'ㄸ 4226596 '등 일련 번호로 1∼7등까지 추첨, 이자를 한번에 몰아주는 방식이다.
외환위기 당시 '묻지마 채권'도 전시돼있다. 당시 돈이 급했던 국내 금융기관들이 지하에 숨어있는 돈을 끌어내기 위해 발행한 것으로 자금 출처를 묻지 않고 상속세까지 면제해주는 '비실명 채권'이다. 이외에 당시 서민들의 눈물을 자아냈던 동화은행 주권 등도 볼 수 있다.
■Zone4- 나만의 주권 만들기
모든 것을 둘러보고 나면 체험 코너가 기다리고 있다.
제일 처음 마주하는 것은 위조 유가증권 식별기다. 통일 규격 유가증권에 숨겨진 위변조 방지 요소들을 실물과 위조증권을 대조해 실제로 식별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 증권 두 장을 놓고 빛을 비추면 실제 증권 안에서는 숨어 있던 글자가 빛을 발한다. 빛을 발하지 않는 것은 그럴 듯하게 만들어진 위조 증권이다.
이 외에도 위조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증권 안에 숨겨진 치밀하고 다양한 장치들을 보고 자세한 설명도 들을 수 있어 흥미롭다.
체험코너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무엇보다 '나만의 주권 만들기'. 컴퓨터 안에 자신의 이름과 스스로 차리고 싶은 회사 이름을 입력하면 나의 주권이 프린트된다. 1주권부터 1만주까지 8가지 권종이 자동으로 선택되기 때문에 최고권인 1만주권을 받은 사람들에게선 기분좋은 탄성이 터진다.
내가 정한 회사명과 나의 이름 옆에 '대표이사'라고 찍힌 주권을 받아들면 마치 한 기업의 사장이 된 듯한 벅찬 기분을 느끼게 된다.
/seilee@fnnews.com 이세경기자
■사진설명=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있는 증권박물관에는 인류의 경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7세기 무역 강국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발행한 증권과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발행한 주권을 통해 세계 경제의 과거와 현재를 생생히 엿볼 수 있다. 세계 2번째로 개관한 증권박물관 내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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