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미술평론가 윤진섭의 문화탐험] <20> 황주리-감시당하는 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8.10.09 17:02

수정 2014.11.05 11:39

■숨막힐듯한 상황서도 거침없는 몸의 대화

▲ 작가 황주리
도시는 비정하다. 허공을 향해 치솟은 초고층 빌딩사이로 물 흐르듯 흐르는 차량들의 행렬과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물결로 넘쳐나는 도심은 특유의 비정함을 화려한 색채로 감추고 있다. 서울을 비롯하여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베이징, 상파울루와 같은 인구 1000만명 이상의 거대도시는 회색빛 일색이다.

우중충한 콘크리트 숲에서 번쩍이는 고층건물의 미려한 유리창과 그 밑을 오가는 개미처럼 작아 보이는 행인들. 빈곤과 허영, 감각적인 쾌락과 육체적 노동이 공존하는 도시는 매일 비정한 뉴스를 토해낸다. 그러나 살인을 비롯하여 강도, 강간, 매춘, 마약, 폭력 등의 범죄가 끊이지 않는 대도시의 밤거리는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한 건물들로 인해 특유의 음습한 느낌이 그럴 듯하게 포장된다.

존 보이트와 더스틴 호프만이 열연한 ‘미드나이트 카우보이’는 비정한 도시의 이면을 잘 보여준 영화다.

종마처럼 튼튼한 몸 하나만을 믿고 뉴욕으로 진출한 시골뜨기 조(존 보이트 분)와 닳고 닳은 뚜쟁이 랏소 사이의 끈끈한 우정을 다룬 이 영화는 도시의 삶이 아무리 신산하더라도 인간이 간직해야 할 미덕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황주리는 도시의 삶을 그리는 화가다. 그가 쏟아내는 화려한 언설들은 모두 도시와 관계된 삶의 단편들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시의 사냥꾼’ 혹은 ‘도시적 이미지의 채집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에게 이런 별칭이 붙은 것은 그가 도시를 떠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 ‘여행에 관한 명상’ 131×162cm 엽서에 아크릴릭,2007

도시는 그가 자란 고향이자 영감과 소재의 원천이다. 그는 지난 30여년 동안 줄기차게 도시를 그려왔다. 그의 그림은 도시적 삶에 대한 기록이자 피폐하거나 화려한, 혹은 음울하거나 역동적인 도시인들의 일상에 관한 보고서다.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내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그림에 빈번히 등장하는 눈이다. 하나의 화면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수십 개의 눈동자들, 그것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화가를 응시하는 어떤 시선인 것 같다. 그림이 그것을 그린 화가의 내면의 투사라고 한다면 적어도 그것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연의 끈이 신체와 근접한 곳에서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을 간단히 ‘감시’라고 해 두자.

도시적 삶이 감시당하는 삶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우리는 도처에서 감시를 당하며 살아간다. 조지 오웰이 말한 ‘빅 브라더’처럼 일상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감시당하고 기록되고 정보로 처리된다. 거리에서, 백화점에서, 식당에서, 호텔에서, 미술관에서, 심지어는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눠야 할 카페에서조차 감시카메라는 우리의 동정을 일일이 기록한다.

▲ ‘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 91×117cm 캔버스에 아크릴릭,2000

황주리가 묘사하는 그림의 배경이 앞에서 열거한 장소라는 사실은 그런 점에서 역설적이다. 그의 그림은 낭만적이며 정감적이다. 그는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에게 진한 애정을 갖고 화려한 언설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문제는 시선이다. 그는 왜 그토록 많은 감시의 시선들을 그림의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가.

그의 그림은 옴니버스 형식을 띤다. 하나의 화면에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하는 형식은 마치 옴니버스 영화를 연상시킨다. 마치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일상의 풍경들은 무심코 지나친 삶의 진리를 일깨워준다. 화면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행위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노래를 부르거나,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키스를 하거나, 다림질을 한다. 황주리는 그 장면을 포착하여 화면에 박제화한다. 그것은 그칠 줄 모르는 몸의 대화요 몸의 부딪침이다. 그 몸의 대화와 부딪침을 보면서 관객은 자신을 투사하고 그림의 현재시제로부터 과거를 이끌어낸다. 그리고는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차, 그 아득한 과거의 세계를 향해 몸을 싣는 것이다.

황주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눈동자들은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들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듯한 시선의 강렬한 느낌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을 감시하는 카메라를 연상시킨다.

감시는 규율과 함께 푸코의 명저 ‘감시와 처벌’의 주제를 이룬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시간의 관리와 엄격한 규율에 의한 노동자들의 통제는 감시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벤담이 설계한 원형감옥인 파놉티콘이다. 비록 실현이 되지는 못 했지만 죄수를 교화할 목적으로 설계된 이 교도소 건물은 중앙이 어두운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밝은 곳에 있는 죄수들은 어두운 곳에 있는 간수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그러한 장치는 사람을 얼마나 주눅들게 하는가.

어두운 곳에서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죄수는 감시자에게 낱낱이 노출돼 있다. 남이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죄수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옥죄고 감시하게 하는 무언의 규율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 숨 막힐 듯한 상황, 그것이 과연 교도소에만 해당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푸코가 이 가공할 현대사회의 규율체제를 가리켜 ‘파놉티시즘’이라고 부른 것처럼, 이 감시의 내면화는 현대의 전자정보 시스템을 통해 점차 사회 전반으로 번져나갔다. 그 결과 도시는 이제 거대한 교도소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감시 시스템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보이지 않는 시선에 의해 감시당한다.

거리에서, 백화점에서, 서점에서, 직장에서, 박물관에서, 공항에서, 심지어는 가장 프라이버시가 보장돼야 할 객실에서조차 감시카메라에 의해 감시당한다. 이 가공할 프라이버시의 침해 앞에 개인은 무력할 뿐이다.
인간 스스로가 만든 기계에 의해 인간 자신이 감시당하는 이 역설. 황주리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많은 시선들은 우리의 도시적 일상을 감시하는 시선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yoonjs053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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