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대기업

[이병철 회장 탄생 100년 ‘호암을 기리다’] (5·끝) 호암에게 미래의 길을 묻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1.19 14:29

수정 2010.01.19 18:52


▲ 호암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본지는 지난 16일 언론 사상 최초로 ‘금단의 성역’으로 불리는 경기 용인 포곡읍 가실리 소재 호암묘지를 찾아 묘소와 묘비, 동상, 호암장 등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고인이 한국경제에 남긴 거대한 족적과 숭고한 정신은 사후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묘지 현장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사진=조은효기자

지난 16일 서울에서 1시간 남짓 버스로 달려 도착한 경기 용인 포곡읍 가실리 소재 호암미술관.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30대부터 수집한 국보급 문화재들이 전시된 이곳엔 매서운 추위에도 주말 나들이객들로 붐볐다. 호암 미술관 내 희원(熙園) 꽃담길을 따라 걷자 키 작은 장승들이 곳곳에 서 있다. 눈길에 새겨진 발자국을 따라 무심코 읍청문으로 들어선다.


이 ‘비밀의 문’에 들어서자 멀리 구릿빛 동상 하나가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가선 동상은 호암의 생전 모습 그대로다. 양복에 안경, 잘 빗어넘긴 머리, 꽃문양 넥타이핀. 호암이 생전에 시대를 앞서는 선견을 보여줬듯 동상의 시선도 먼 곳을 향해 있다. 이 동상 옆 대리석판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인재제일, 기업은 사람이다.…(중략)…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한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시키는 데 시간을 보냈다. 삼성이 발전한 것도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인 것이다. 1980년 7월 3일 전경련 회의에서.’

다시 삐뚤삐뚤한 길에 난 발자국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얼마 안 가 묘비 하나가 보인다. ‘삼성창업주 호암 경주 이공 병철지묘.’ 묘비엔 그 어떤 수식어도 없다.

묘비 뒤 길을 따라 가자 얕은 언덕에 호암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봉분 아랫부분은 12지신상으로 보이는 부조가 호위를 하고 있다. 비탈길을 오르는 동안 기승을 부리던 삭풍도 이곳에선 자취를 감춰 온화한 기운마저 감돈다. 발 아래로 호암이 생전에 열정을 쏟아 가꾼 에버랜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깔끔하게 정돈된 잔디 위로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봉분 앞 불 꺼진 향로엔 축축하게 젖은 재만이 쌓여 있다. 한국경제를 이끌었던 고인의 묘엔 몇 마리 화려한 공작새들이 한가롭게 메마른 겨울 잔디를 쪼아댄다. 쓸쓸한 묘를 돌아 내려오니 숲 아래쪽에 청기와를 얹은 한옥 저택이 눈에 들어온다. 저택 정면 위편엔 ‘호암장’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이곳은 호암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때 즐겨찾았던 곳. 호암은 생애 최대 승부수였던 반도체사업에 뛰어들 때도 이곳을 찾아 장고를 거듭했을 것이다. 경남 의령 생가에서 대구 삼성상회를 거쳐 불꽃같은 생애를 살다 간 호암의 웅대한 삶은 이곳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호암이 떠난 20여년 후 세상은 그를 재조명한다지만, 이곳엔 호암의 현신처럼 공작새 한 마리가 외롭게 거닐 뿐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경제상황과 불안한 정치상황 속에서 탄생 100주년을 맞은 ‘경영의 선인’ 호암.

그를 오랜 영면에서 깨워 생전에 혼신을 바쳐 사랑한 한국경제의 현안과 미래에 대한 혜안을 구해본다. 호암이 생전에 남긴 촌철살인의 어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천상 대담’은 이렇게 이뤄졌다.

―한국경제가 올해 경제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이럴 때 기업은 어떻게 대응해야 합니까.

△경제라고 하는 것은 계절에 춘하추동이 있는 것처럼 반드시 그 기복이 있다. 선진제국도 다 그랬듯이 부가 축적되면 인간은 상대적으로 나태해지는 것이다. …(중략)… 어쨌든 모든 분야에 생산원가를 낮추고 타 경쟁기업보다 1원이라도 저가 생산을 할 수 있다면 극심한 불황으로 경쟁기업이 모두 도산을 하더라도 우리 그룹은 살아남을 것이 아닌가. 생산 코스트를 낮추고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이 기업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본 원칙이다.(1983.9.22. 사장단회의에서)

―왜, 기업에 인재가 중요합니까.

△기업은 사람이다. 나는 사업을 통해서 ‘기업은 사람’이라는 원리를 잠시도 잊지 않고 실천해 왔다. 국가의 발전이 탁월한 정치가에 달렸다면 기업의 발전은 유능한 경영자에 달려 있다. 삼성이 발전한 것도 결국 남보다 유능한 인재를 많이 기용한 결과라고 하겠다. …(중략)(1980.7.3. 전경련 강연에서)

―진정한 ‘기업가 정신’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기업을 하는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는 금전욕을 뛰어넘는 창조적 의욕에 의한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런 의욕과 사회적 책임감이 잘 화합될 때 진정한 의미의 기업가정신이 우러나오는 것이다. 제일제당의 성공은 나에게 창업의 기쁨과 함께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중략)(1976.4. 재계회고에서)
―‘잉여재산이란 신성한 위탁물’이란 지론을 폈던 이유가 궁금합니다.

▲ 일본을 방문해 사업을 구상하던 호암(1951년)

△사업가는 누구나 돈 버는 데 우선 목표를 둔다. 돈은 안락한 생활은 물론이요 명성까지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명성도 사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중략)… 사실 돈이란 쓸 만큼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이상은 오히려 짐이 될 뿐이다. 따라서 남은 돈은 언제나 사회에 돌려보낸다는 생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1978. 재계의 거목 이병철에서)

―어떻게 해야 한국이 확실한 선진국이 될 수 있습니까.

△선진국 대열에 참여하는데 세 가지 방법뿐이라고 한다. 첫째, 남이 다 만드는 물건을 누가 싸게 만드느냐. 둘째, 값은 같되 얼마나 품질을 좋게 만드느냐. 셋째, 좋은 품질을 누가 남보다 앞서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1983.2.26. 전자반도체회의에서)

―자유무역이 한국경제에 필요합니까.

△한 나라가 자기 혼자서만 영원히 번영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남을 살려야 비로소 자기도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역사 이래의 철학이다. 한국과 일본은 각기 서로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점을 똑똑히 인식해야 한다.(1984.8.26. 일본 요미우리신문 기고문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어떤 관계여야 합니까.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서로 공존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경제 전체의 앞날을 위해서도 꼭 지켜야 할 문제다. 중소기업이 있어야 대기업도 발전하고 대기업이 있어야 중소기업을 끌어주고 키워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대기업은 앞에서 끌고 중소기업은 뒤에서 미는 투철한 공존공영의 정신이 없어서는 더 이상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1982.10.12. 전경련 역대회장 좌담회에서)

―2세 경영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우리나라 경제를 두 어깨에 메고 가야 할 2세 경영자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사업은 완전무결하게 해야겠고 항상 공존공영의 원칙에 입각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사업의 구체적인 방법론에 지나지 않겠고, 그보다도 정신면에서 국가를 생각하고 정직하게 사업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고 본다.(1980.7.3. 전경련 강연에서)

―효과적인 신수종사업 준비 방안을 알고 싶습니다.

△특정 상품이나 사업이 정상에 올랐을 때 다른 상품이나 다른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 전자의 경우 신종 상품 개척에서 한발 늦었다. 모든 상품과 사업은 그 수명이 있고 한계가 있다. 이를 미리 하는 지혜가 아쉽다. 그 지혜를 포착하기 위해 사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1982.3.28. 워싱턴에서)

모든 설비투자계획에 있어서 5년 정도를 내다본 단기 안목 위에서 세우지 말고 10년 이상 50년 정도의 장기 안목 위에서 세워야한다.…(중략)(1977.6.17. 삼성조선 건설현장에서)

―한국경제 발전을 위한 재계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재계가 서로 불목(不睦)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 그것이 확대되어 가는 것 같다. 총수끼리 만나 화해하고 잘 지내는 것이 경제발전과 나아가 국가발전을 위해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1980.7.3. 간담회에서)

/hwyang@fnnews.com 양형욱 조은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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