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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라는 스가는 왜 '아베의 길'을 걷나

조은효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0.10.17 16:38

수정 2020.10.17 19:33

관방장관 시절엔 아베 야스쿠니 방문 만류 
공물 봉납도 안했는데 취임 후 첫 가을 제사에 공물 보내 
재임 기반 다지기 위해서는 아베 계승 표방해야 
묻지마 계승, 일본학술회의 사건으로 이미 상처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지난 달 16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 모습. AP뉴시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지난 달 16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 모습. AP뉴시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가 17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전철을 밟아 야스쿠니신사 가을 제사(추계예대제)에 공물을 봉납했다. '아베 루트 답습'이 재임 기반을 다지기 위한 가장 안정적이고 손쉬운 선택이라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베 정권에서는 참배 만류했다는데
스가 총리가 바친 공물은 제단에 비치하는 상록수의 일종인 비쭈기나무로 된 '마사카키'다. 전임 아베 총리가 바쳤던 것과 똑같다. 취임 초기 직접 참배에 나설 경우, 한국, 중국과의 마찰은 물론이고, 미·일 관계에도 부담이 된다. 공물 봉납은 사실상 일본 국내적으로 직접 참배에 가까운 효과를 내는 절충점이다.


도쿄 지요다구 소재 야스쿠니 신사는 도조 히데키 등 태평양 전쟁 A급 전범 14명의 위패를 비롯해 1867년 메이지 유신을 전후해 일본에서 벌어진 내전과 일제가 일으킨 여러 침략전쟁에서 죽은 246만6000여 명의 위패가 안치돼 있다.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이자 극우들의 성지와 같은 곳이다.

스가 총리는 지난 7년 8개월 간 아베 제2차 내각의 관방장관으로 재임하면서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않았고 공물도 보내지 않았다. 외교소식통들에 따르면 "되레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신중한 입장이었다"고 한다.

지난 2013년 12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로이터 뉴스1
지난 2013년 12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로이터 뉴스1

아베 전 총리가 2013년 12월, 재임 당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한 것도 내각의 위기관리를 총괄하는 관방 장관 직책인 스가의 입김도 상당 부분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 방문으로 한국, 중국의 반발은 물론이고, 미국(오바마 행정부)으로부터 "실망했다"는 소리까지 듣고난 뒤에 야스쿠니행을 멈췄다. 대신, 공물비용을 보내는 것으로 국내 정치와 외교 관계간의 절충점을 모색하려 했다. 물론, 퇴임 후 사흘 만에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해 "영령들에게 총리 퇴임을 보고했다"고 밝혀, 극우 색채를 여실히 보여준 바 있다.

아베 루트는 안전한 선택인가
스가 총리는 '이념'보다는 '실리'를 중시, 현실주의자적인 면모가 강할 것이라는 게 현재까지 일본 학계, 정치권의 대체적 시각이다.

아베 총리 재임 당시 야스쿠니행을 만류했다는 스가 총리가 아베 총리와 똑같이 공물을 봉납한 것은,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지 75년이 된 지난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로이터 뉴스1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한 지 75년이 된 지난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로이터 뉴스1
무파벌인 그는 자민당 다수 파벌의 담합으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 여기에는 아베 전 총리보다 더 우파적인 세력도 포함돼 있다. 우파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향후 중의원 해산 및 조기 총선까지 염두에 둔다면, 우파 성향의 지지층을 향한 제스쳐가 필요하다. 아베 골수 지지층은 대략 40%정도로 여겨진다. 퇴임 직전 코로나 실책, 연이은 측근 비리, 경기 악화 등에도 "그래도 아베"라도 외쳤던 세력이다.

당장 내년 9월 임기 전까지 확실한 재임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아베 지지층을 그대로 물려받는 게 급선무다. 최소한 아베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보여야 하는 것이다.

아베 노선 답습은 스가 총리에게 가장 손쉬운 선택지라는 뜻이다. 이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신념이나 원칙이라기 보다는 상황 논리에 충실하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 스스로 "관방장관이 되기 전에는 야스쿠니 참배를 했다"고 지난 2014년 2월 일본 중의원에서 밝힌 바 있어, 언제든 정치 상황에 따라 입장이 바뀔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베 노선의 '묻지마 답습'이 안전한 것만은 아니다.

스가 총리는 과거 아베 정권에 비판적 목소리를 낸 학자 6명을 임명에서 배제한 일본학술회의 사건으로, 정권 출범 한 달 만에 논란에 휩싸였다. 70%대 중반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은 이 사건 하나로 50%대까지 내려왔다.
일본의 정가의 한 소식통은 "스가 총리는 일본 학술회의 자체에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다"면서 "지나친 아베 정권 의식 탓에 상황을 오판했다"고 지적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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