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노동일칼럼

[노동일 칼럼] APEC 이후 : 디테일에 숨은 악마

노동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11.03 18:09

수정 2025.11.03 18:09

관세 협상·원자력협정 개정
한미정상 두 과제 놓고 대화
관세 협상 타결은 반갑지만
핵잠 건조 문제로 이슈전환
미국쪽에 치우친 '균형외교'
中과의 갈등 조율은 숙제로
노동일 주필
노동일 주필
2025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앞두고 우리 언론들이 꼽은 핵심 과제는 두 가지였다. 대미 관세협상 마무리와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이 그것이다. 둘 다 한미 정상회담에서 풀어야 할 문제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일정을 놓고 매일 달라지는 소식에 일희일비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한미 관세협상이 타결된 것은 경위야 어떻든 긍정적으로 평가할 일이다.

3500억달러 투자 프레임이 그대로인 건 물론 아쉽다. 하지만 연간 현금투자 액수의 상한을 200억달러로 정하고, '상업적 합리성'이라는 기준 등은 진전된 부분이다. 일부 혹평도 있으나, 중국의 희토류 같은 반격 카드도 없고, 인도나 브라질처럼 미국과 대거리를 해 볼 형편도 아닌 우리 현실을 외면하기 어렵다.

어색한 발음이지만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에 대해 "아주 까다로운 협상가…"라고 한 트럼프 대통령의 말은 단순 립서비스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등도 기억해야 할 공신들이다. 불확실성은 일단 걷혔지만 한미 양국에서 다른 말이 나오는 것에서 보듯 디테일의 악마는 여전히 존재한다. 최종 문서 교환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두 번째 과제인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은 더 짙은 안갯속으로 들어간 느낌이다. '일본과 같은 수준'의 원자력협정이 우리의 숙원이자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목표였다. 일본은 1988년 미일 원자력협정 개정으로 사용후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권한을 확보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핵추진 잠수함의 연료를 우리가 공급받을 수 있도록 대통령님께서 결단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디젤 잠수함이 잠항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북한이나 아니면 중국 쪽 잠수함 추적활동이 제한이 있습니다."

핵추진 잠수함 또는 원자력추진잠수함(원잠) 보유 의사를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실에 우선 놀랐다. 우리가 원잠 건조를 추진하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럼에도 국가원수가 공개된 자리에서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원잠은 우리가 건조하고 미국 측에서는 원자력 연료만 공급하길 원하는 게 이 대통령의 의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료 공급을 허용해 주시면 저희가 저희 기술로 재래식 무기를 탑재한 잠수함을 여러 척 건조해서 우리 한반도 동해, 서해에 해역 방어활동을 하면 미군의 부담도 상당히 많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의 원잠을 승인한다. 단 미국의 필리조선소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화답에서 보듯 공개적으로 오간 대화는 나중에 수정하기도 어렵다. 한화오션이 인수한 필리조선소는 많이 보도된 것처럼 원잠을 건조할 형편이 못된다. 우리가 모든 시설을 현대화하고, 잠수함 건조기술도 전수하고, 연료는 미국에서 공급받는다면 우리는 아무런 실익을 챙기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으로 잠수함 건조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미 국무부, 의회 등에 겹겹이 포진한 '핵비확산론자'들의 그물을 뚫는 것은 더 어려운 과제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원잠 건조계획이 좌초된 것도 그 때문이다.

중국을 직접 거론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중 정상회담이 예정된 상황에서 중국측 반발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이런저런 반발과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전제하에서 최소한 10년은 걸려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30년 숙원'이 당장 해결될 것처럼 김칫국을 마시는 일은 성급하다. 일부의 관측처럼 원잠 건조로 한미동맹 현대화에 적극 나서는 대신 핵연료 재처리와 우라늄 농축 허용을 맞바꾸는 심모원려가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사용후핵연료의 재처리나 우라늄 농축 부분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진척될 수 있도록 지시해 주시면 조금 더 빠른 속도로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는 이 대통령의 언급을 주목하게 된다.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국익을 증진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보이고 있다. "'원잠 건조 승인'은 한국이 미국의 안보체계에 더욱 통합되는 조치"로서 역내 "새로운 갈등요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관세 및 통상 숙제도 완전히 풀지 못한 상태에서 새롭고 더 어려운 숙제가 주어진 셈이다. 어쩌겠는가. 한시도 긴장을 풀고 잠들지 못하는 게 우리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거의 100일 만에 관세협상을 풀어낸 것처럼 정부와 민간 관계자 모두가 터프 네고시에이터(tough negotiator), 까다로운 협상가가 되어 새로운 도전과제 해결에 나설 수밖에 없다.

dinoh7869@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