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일본 민영방송사 TBS가 방영한 드라마 '관료들의 여름'에서 주인공인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 관료 가자코시의 대사다.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접어들던 1950~1960년대를 배경으로 자동차와 전자 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던 통상산업성 관료들의 분투를 그린 이 드라마는 당시 관료들이 국가 산업의 미래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책을 설계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요즘 도쿄 가스미가세키(일본 중앙행정기관 밀집지구)에 '관료들의 여름'이 돌아오고 있는 듯하다. '산업 정책'이라는 말이 다시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고 있다. 지난 30년간 구조개혁과 통화완화 중심으로 흐르던 분위기와 달리 정부가 특정 산업을 장기적·전략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을 정책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서다. 단순한 예산 확대를 넘어 제도 전반이 산업 정책에 맞춰 재편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산업정책 부활을 이끈 건 놀랍게도 미국이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요구와 고관세 정책이 일본 관료사회를 자극하면서 현 상황에서 전략산업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이 커지고 있다.
경제산업성 예산 확대가 대표적 사례다.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이 최근 국회에 제출한 2026회계연도 예산안은 약 122조3092억엔(약 1149조9877억원) 규모다. 이 가운데 경제산업성 예산만 약 2조444억엔(약 19조2220억원)으로 전년 대비 19% 증가했다.
방위비를 제외하면 증액의 핵심은 산업·기술·에너지 전환 분야다. 특히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분야에 1조2390억엔이 배정돼 전년 대비 3.7배 늘었다. 최첨단 반도체 양산을 목표로 한 '반도체 연합군' 라피더스에 대한 추가 출자 1500억엔과 연구개발 보조 6300억엔이 포함됐다.
여기에 로봇·기계 AI 제어 '피지컬 AI' 정비와 관련해 새로 3873억엔을 투입하고, 향후 5년간 총 1조엔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번 산업정책 변화는 예산 숫자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본 공정거래위원회는 최근 경제안보, 즉 국가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조선기업 간 정보교류를 카르텔이나 공정경쟁 위반으로 보지 않고 산업정책 목표에 맞춰 경쟁정책을 조정하기로 했다. 예산과 제도, 경쟁정책이 한 몸처럼 산업전략에 맞춰 재편되는 셈이다.
부처 예산 집행 방식 역시 변했다. 경제산업성은 녹색전환추진기구(GXA), 정보통신추진기구 등 전문기금을 통해 자율적으로 예산을 집행함으로써 유연하고 신속하게 산업정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됐다. 단순한 정기 배정이 아닌 기민한 집행과 전략적 대응이 가능해진 것이다.
관료들의 자신감 회복도 눈에 띈다.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일본 관료들은 과거 한국에 비해 뒤처졌다고 평가되던 조선·반도체 분야에서도 '역전이 가능하다'는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와 집권 자민당의 든든한 지원 아래 정부와 민관이 라피더스 등 전략산업에 천문학적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것이 일례다. 최근 일본 대기업 캐논이 라피더스 제품을 발주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만 TSMC 공장 유치같이 자국 산업 발전을 위해 외국 기업에까지 대규모 지원을 결정하는 과감함도 일본 산업정책의 특징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외국 기업 대상 지원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한국에 주는 시사점은 명확하다. 산업구조를 바꾸려면 단기적 세액공제나 지원 확대에만 의존해서는 부족하다. 일본처럼 전략산업을 명확히 설정하고 장기적·집중적 예산 투입과 제도적 지원, 성과 관리까지 결합한 구조적 접근이 필요하다. 단순한 재정배분을 넘어 정책과 제도의 전방위적 재편이 핵심이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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