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당시에도 기계가 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컸다.
맹자는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 했다. 안정된 생업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건강한 사회 역시 유지되기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도구가 스스로 움직인다면 노동이 필요 없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민에게 자기수양과 공동체적 책임의식은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보았다. 노동으로부터의 자유가 인간을 더 고귀하게 만들 가능성과 더 쉽게 타락시킬 가능성이 동시에 열려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생산성에서 AI와 로봇에 뒤처지더라도 인간 노동을 생산 과정에서 배제하는 것은 소중한 생산자원을 버리는 일이다. 비교우위의 논리가 말해주듯, 사회 전체의 효율은 모든 자원이 제 역할을 찾을 때 극대화된다. 설령 노동 없는 생계가 가능하다 해도 인간 노동이 생산 과정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은 경제 전체로 보면 여전히 손실이다.
AI와 로봇 기술 발전이 곧 인간 노동의 광범위한 배제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생산을 어떻게 조직할지는 결국 제도와 선택에 달려 있다. 인류의 역사적 경험과 고민의 결과는 다수의 구성원이 생산의 책임을 담당하는 쪽을 가리킨다. "누가 얼마를 가질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임은 분명하지만, 이를 재분배만으로 해결하는 것보다는 "생산과 노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하여 생산 과정에서부터 그 답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역사 속 많은 사회가 이미 생산된 몫을 둘러싼 지대추구와 분배갈등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여주는 기술 발전과 인간의 노동은 양립할 수 있을까? 생산성 향상이 일하는 사람의 수가 아니라 각 사람이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쪽으로 활용된다면 그것은 가능하다. 기업의 인사조직과 고용관행, 나아가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이중구조의 개선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생산에 참여하고 높아진 생산성의 과실을 자신의 소득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경제와 제도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김민성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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