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과학

차세대 하이니켈 배터리의 보호막이 수명 갉아먹는 범인이었다 [언박싱 연구실]

김만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5.29 05:56

수정 2026.05.29 07:14

<41> 한양대 ERICA 방진호 교수팀
제조공정 중 공기에 노출돼 불량 보호막으로 변질
1000번 충방전 과정에서 배터리 수명 반토막난 셈
원료에 리튬 넉넉하게 더 넣어주면 불량구조 해결

택배 상자를 열 때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대학 연구실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을 바꿀 놀라운 발견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다만 '논문'이라는 두꺼운 포장지에 쌓여있을 뿐이죠. '언박싱 연구실'에서는 복잡한 수식과 이론 대신, 여러분이 알고 싶은 알맹이만 쏙 골라 담겠습니다. 자, 그럼 상자를 열어볼까요? 오늘 언박싱할 주인공은 바로 이 연구입니다.
배터리 입자 알갱이가 반으로 나뉘어 공기 노출로 무너진 불량 구조와 리튬 보상으로 되살아난 정상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불량 표면을 파괴하는 붉은색 산소 분자와 격자 구조를 단단히 복원하는 초록색 리튬 이온의 대비는 넉넉한 재료 배합이 배터리 수명을 늘리는 비결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래픽=챗GPT 생성)
배터리 입자 알갱이가 반으로 나뉘어 공기 노출로 무너진 불량 구조와 리튬 보상으로 되살아난 정상 구조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불량 표면을 파괴하는 붉은색 산소 분자와 격자 구조를 단단히 복원하는 초록색 리튬 이온의 대비는 넉넉한 재료 배합이 배터리 수명을 늘리는 비결임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래픽=챗GPT 생성)
[파이낸셜뉴스] 국내 연구팀이 차세대 배터리로 주목받는 하이니켈 양극재의 망간 보호막이 특정 공정 환경에서 오히려 배터리 수명을 갉아먹는 '부비트랩'으로 돌변하는 원인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특히 원료 배합 레시피를 미세 조정해 손상된 배터리 구조를 스스로 치유하게 만드는 실질적인 공정 전략까지 제시해 학계와 산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 에너지는 '속'에, 안전은 '겉'에… 완벽했던 보호막의 배신

전기차의 주행거리를 늘리려면 배터리 속 알맹이에 에너지를 많이 담을 수 있는 '니켈'을 꽉 채워야 한다. 하지만 니켈이 많아질수록 배터리 표면이 쉽게 깨지고 수명이 급격히 줄어드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호두과자처럼 속(코어)은 에너지가 큰 니켈로 채우고, 겉껍질(쉘)은 단단하고 값싼 '망간'으로 단단히 감싸는 구조를 고안했다. 이론적으로는 에너지를 많이 모으면서도 겉은 튼튼한 완벽한 보호막이었지만, 정작 실제 공장에선 원인 모를 표면 붕괴와 수명 저하 현상이 반복되며 상용화의 발목을 잡았다.

한양대 ERICA 방진호 교수 연구팀은 이 예기치 못한 성능 저하의 숨겨진 원인이 배터리를 다 만들고 난 뒤가 아니라, 배터리 최종 재료를 만들기 전 단계의 중간 원료인 '수산화물 전구체' 합성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밝혀냈다.

■ 공기 중에 노출된 원료, 두 가지 경로로 전해액 공격하는 '촉매'로 돌변

연구팀이 밝혀낸 원인은 뜻밖에도 '공기(산소) 노출'이었다. 배터리 양극재의 바탕이 되는 중간 원료가 합성 과정에서 산소가 풍부한 대기에 노출되면, 표면에 있던 망간이 지멋대로 녹슬듯 변질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 상태로 배터리 알갱이들을 단단한 결정으로 뭉치기 위해 고온의 오븐에 굽는 '열처리(소성) 과정'을 거치면 결정 구조가 비정상적으로 찌그러지는 '얀-텔러 왜곡(Jahn-Teller distortion)'이 발생하게 된다. 배터리를 보호해야 할 망간 보호막이 오히려 산소 구멍이 숭숭 뚫린 '결함 스피넬 구조'라는 불량품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변형된 불량 표면은 전자가 너무 풍부해져서 주변 물질을 강하게 끌어당기고 가차 없이 공격하는 화학적 성질(루이스 염기성)을 띠게 된다. 이 표면은 배터리 내부의 전해액과 만났을 때 두 가지 경로로 전해액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전해액의 화학 결합을 직접 가위로 자르듯 분해하는 방식(친핵성 공격)과, 주변의 물 분자가 개입해 화학 결합을 끊어내며 깨뜨리는 방식(가수분해)을 동시에 가동하는 '부반응 촉매'가 되는 것이다.

결국 이 과정에서 표면이 무너지며 흘러나온 망간 이온이 반대편 음극(흑연)까지 넘어가서 배터리 전체를 망가뜨리는 연쇄 반응(크로스톡)을 일으킨다. 실제로 연구팀이 니켈을 95% 넘게 채운 초정밀 배터리로 실험해 보니, 이 공정상의 불량 때문에 배터리 수명이 닳는 속도가 평소보다 2배나 빨라졌다. 배터리를 1000번 충전하고 방전하는 동안 수명이 순식간에 반토막 난 셈이다.

■ "불량 치료하는 리튬 보상 전략"… 레시피 바꿨더니 수명 90% 이상 유지

방진호 교수 연구팀은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공장 공정을 크게 바꾸지 않고도 이 결함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원료를 구울 때 리튬의 양을 기존 레시피보다 10% 더 넣어서 합성하는 '리튬 보상 전략'이다.

원료에 리튬을 넉넉하게 더 넣어주면, 리튬 이온들이 찌그러지려는 불량 구조를 양옆에서 단단히 붙잡아 찌그러지지 못하게 막아준다. 동시에 느슨해졌던 망간과 산소 사이의 결합력을 단단하게 복원시켜 준다.

이 방법을 적용하자, 공기 노출로 원료가 일부 손상되었더라도 최종 완성된 배터리 재료는 다시 단단하고 안정적인 정상 구조를 되찾았다. 그 결과 극단적인 하이니켈 환경에서도 1000번을 작동해도 처음의 90% 이상의 우수한 용량 유지율과 높은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방진호 교수는 "이번 연구는 기존 망간 안정화 양극재의 표면 불안정성의 숨겨진 기원을 밝혀낸 것"이라며, "리튬 보상 전략을 통해 견고한 고에너지 배터리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향후 차세대 전기차용 양극재 제조 공정의 핵심 품질 관리 지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 결과는 에너지·환경 분야 세계 최고 권위 학술지인 '에너지와 환경과학(Energy & Environmental Science)'에 발표됐다. 이 논문에는 한양대 ERICA 심진하 석박통합과정생이 제1저자로, 유영걸·최유빈 석사과정생이 공동저자로 참여해 대한민국 청년 과학도들의 연구 역량을 세계에 증명했다.


원인조차 몰랐던 배터리 수명 저하의 실마리가 제조 공정 초기의 '산소 한 번 닿음'에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레시피 하나로 이를 되돌릴 수 있다는 발견이 차세대 전기차 시대를 한 걸음 앞당기고 있다.

monarch@fnnews.com 김만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