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쓸모없다고 밀어낸 것들은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내책 톺아보기]
유명종 시인이 말하는 쓸모없음의 쓸모
세상은 늘 우리에게 '쓸모'를 요구한다. 더 빠르게, 더 경쟁적으로, 더 생산적으로 살라고 등을 떠민다. 잠들기 전에 주문한 물건이 새벽이면 문 앞에 도착한다. 치열한 질주다. 모든 생산 활동은 속도와 경쟁, 그리고 쓸모의 저울 위에서 냉정하게 계산된다. 급기야 인간은 이제 기계를 넘어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를 인공두뇌까지 만들기 시작했다.
잠시라도 멈춰 서면 뒤처질 것 같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를 몰 듯 우리는 누구나 불안을 안고 달린다. 그러는 사이 정작 우리 안의 무엇인가는 소리 없이 지워지고 있다. 삶의 리듬, 느림의 감각, 그리고 여백이 주는 잔잔한 설렘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무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는데도 마음 한쪽은 오히려 더 비어간다.
느린 걸 좋아한다. 늦게 피는 들꽃, 천천히 읽히는 문장, 시간을 품은 물건들… 운동도 산책이나 걷기, 자전거 타기처럼 몸을 천천히 쓰는 일을 좋아한다. 천천히 움직일 때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 천천히 걸어야 발견하는 풍경이 있다. 속도의 방향이 목적지라면, 느림은 과정이다. 자동차는 세계를 관람하게 하지만 걷기는 세계로 들어가게 한다. 느림은 게으름이 아니다. 세상을 온전히, 그리고 다르게 보는 방식이다.
봄이었다. 벚꽃이 지고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늘 그렇듯 특별한 목적지 없이 걷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풀밭이 온통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민들레였다. 낮게, 아주 낮게 엎드려 피어 있었다. 벚꽃은 올려다본다. 고개를 들어야 보인다. 높고 화려하다. 세상이 잠시 그쪽을 향한다. 반대로 민들레는 내려다봐야 보인다. 몸을 낮춰야, 걸음을 멈춰야 보인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세상이 쓸모없다고 밀어낸 것들은 바로 저렇게 피어 있구나. 낮은 곳에서, 조용히.
산문집 '쓸모없음의 쓸모'를 쓰면서 줄곧 이 장면을 떠올렸다. 우리는 너무 오래 올려다보며 살아왔다. 속도, 경쟁, 성장, 빠른 것, 높은 것, 화려한 것들. 그러는 동안 낮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나던 것들을 무심하게 지나쳤다. 느림, 낭만, 결핍, 흔들림, 그리고 민들레를 닮은 우리네 삶의 숨결 같은 것들 말이다. 세상은 이런 것들을 자꾸 바깥으로 밀어낸다. 쓸모없다고, 부질없다고, 치워두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쓸모없는 것들 덕에 버텨왔다. 누군가는 오래된 노래 한 곡으로 하루를 견디고, 누군가는 저녁 무렵 잠깐 올려다본 노을빛 하나로 마음을 추슬렀다. 어떤 사람은 이미 떠난 사람의 목소리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생존과 직접 연결되지 않지만, 우리는 이런 감정들, 무용한 순간들 덕분에 끝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쓸모없음의 쓸모'는 세상이 말하는 그 '쓸모'의 기준에 조용히 반기를 드는 산문집이다. 글을 쓰면서 되도록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위로의 문장을 억지로 넣지 않으려 했다. 다만 독자가 어느 문장 앞에서 잠시 멈추기를 바랐다. 멈춰서 돌아보길,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길 바랐다. 그 멈춤과 질문이 잊고 지내던 삶의 감각을 다시 깨우기를 기대했다.
오래전 장자는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알면서도, 쓸모 없는 것의 쓸모는 알지 못한다." 장자의 질문을 마음에 품고 나는 오늘도 걷는다. 질주의 건너편에서.
유명종 시인·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