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건강

얼어붙은 한·러 관계 녹이는 그린닥터스 'K-인술'

변옥환 기자
파이낸셜뉴스

4일 오후 4시 부산 온병원 대강당서 18명 정예 봉사단 발대식 개최
코로나팬데믹, 러 전쟁으로 단절된 극동러시아 크라스키노 봉사재개
9년 전 온병원서 대장암 무료수술 고려인 3세 '문 류드밀라' 왕진봉사
현지 병원과 협약 통해 한반도 평화 위한 남·북·러 의료 교두보 마련

4일 오후 부산진구 당감동 온병원 15층 대강당에서 개최된 '중국-러시아 역사문화 탐방 및 연추 의료봉사단' 발대식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린닥터스재단 제공
4일 오후 부산진구 당감동 온병원 15층 대강당에서 개최된 '중국-러시아 역사문화 탐방 및 연추 의료봉사단' 발대식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그린닥터스재단 제공

[파이낸셜뉴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한민국과 극동러시아를 잇는 외교적 기류가 그 어느 때보다 얼어붙어 있다.

이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경과 이념을 뛰어 넘어 따뜻한 동포애와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길을 나선 '민간 외교관'들이 있다.

국제의료봉사단체 그린닥터스재단(이사장 정근)과 부산 온병원(병원장 김동헌·전 부산대병원 병원장)은 4일 오후 부산진구 당감동 온병원 15층 대강당에서 '중국-러시아 역사문화 탐방 및 연추 의료봉사단' 발대식을 갖고 5일부터 10일까지 5박 6일간 극동 러시아 의료봉사 대장정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이번 봉사단은 정근 의료총괄단장(안과)을 필두로 외과 김석권 센터장(온병원 성형센터), 가정의학과 정종훈 의료단장(울산군립 울주병원 병원장), 윤선희 의료부단장(온그룹의료재단 이사장) 등 의료진과 박명순 사무총장 등 그린닥터스 임원 모두 18명으로 꾸려졌다.

이들은 선조들의 항일 독립운동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러시아 연해주 하산군과 크라스키노 일대를 방문해 고려인 동포들과 러시아 현지 주민들을 상대로 인술을 펼치게 된다.

부산은행과 신한은행은 이날 발대식에서 각각 2000만원과 1000만원씩 후원해 그린닥터스 러시아 해외 의료봉사단을 격려했다.

이번 의료봉사 일정 중 가장 큰 화제이자 감동을 자아내는 대목은 고려인 3세 문 류드밀라씨(60대) 자택으로의 직접 왕진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러시아 연해주 하산으로 이주해 살던 문씨는 지난 2017년 8월 현지 러시아 병원에서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18년 전 남편과 사별한 후 홀로 어렵게 살아온 그녀는 지독한 가난과 러시아 의료 환경 탓에 수술은커녕 치료를 포기한 채 죽음의 날만을 기리던 처지였다.

그녀의 가슴 아픈 사정은 두만강 국경지대에서 첨단 농사법을 전수하던 한국인 농업기업인 김토마스 대표를 통해 모국의 온병원에 전해졌다.

김 대표는 일제강점기 시절 노동으로 모은 한두 푼을 독립운동에 고스란히 바치며 항일 투쟁의 대부로 살았던 최재형 선생의 얼이 깃든 크라스키노 주민들이 바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깊은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온병원과 그린닥터스는 엄연한 러시아 국적인 외국인 환자의 대수술에 따른 외교적 우려와 수천만 원에 달하는 비용 부담을 기꺼이 짊어지기로 결정했다. 당시 문 씨는 장협착이 심해 복강경 진입조차 힘든 최악의 상태였으나, 온병원 외과팀의 5시간 반에 걸친 사투 끝에 기적적으로 수술에 성공했다. 이후 6개월간 모국에서 지극한 치료를 받고 완치되어 이듬해인 2018년 1월 고향으로 돌아갔던 문 씨를, 그린닥터스가 8년여 만에 다시 찾아가 건강상태를 점검하고 '인술의 AS'를 실천하는 뜻깊은 만남이 성사된 것이다.

그린닥터스 정근 이사장은 "그녀의 작달막한 키와 황색 피부, 뭉툭한 콧날은 한눈에 봐도 우리와 똑같은 우리 동포였다. 오래전 나라 잃은 시절 목숨을 내놓고 일제와 맞섰던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보듬는 일은, 어쩌면 21세기 우리 세대가 이어받아야 할 또 다른 독립운동일지도 모른다"며 재회를 앞두고 소회를 밝혔다.

그린닥터스 의료봉사단이 본격적인 활동을 펼칠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지역은 청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거사 직전 12명의 동지들과 손가락을 베어 혈서로 굳은 의지를 다졌던 '단지동맹비'가 세워진 곳이며, 항일 의병훈련소가 설치되었던 민족의 성지다.

이번 봉사단은 5일 김해국제공항을 출발해 중국 연길공항에 도착, 버스 편으로 훈춘을 거쳐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도착한 뒤 7일 크라스키노 슬라뱐카 의료취약지역 주민들을 위한 집중 무료 진료활동을 전개한다.
이어 8일에는 하산중앙병원(병원장 예브게니·정형외과전문의)을 방문해 필수 의약품과 의료물품을 기증한 뒤 부산 온병원과 하산중앙병원 간 의료교류, 협력관계를 맺고 향후 남·북·러 공동의료사업을 위한 소중한 교두보를 마련할 계획이다.

그린닥터스 의료봉사단은 러시아 일정을 마친 뒤 중국 용정 명동촌의 윤동주 선생 생가와 백두산 천지를 탐방하며 역사의식을 고취한 후 10일 귀국길에 오른다.

이번 봉사단의 단장을 맡은 정근 그린닥터스 이사장은 "현재 동북아 국제 정세와 한러 관계가 얼어붙어 있지만,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는 인도주의적 인술과 뜨거운 동포애 앞에는 그 어떤 국경도, 이념도 장벽이 될 수 없다"라며 "과거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펼칠 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고려인 후손들에게 보은하고, 선조들의 평화 정신을 이어받아 한반도 평화에 작은 이바지라도 하고 돌아오겠다"고 소회를 밝혔다.

lich0929@fnnews.com 변옥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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