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fn광장] 말의 무게, 말의 품격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6.06.10 19:03

수정 2026.06.10 20:20

언어 과잉시대, 말의 값어치 추락
SNS가 말의 속도 너무 빠르게 해
숙성 안 된 말들 쉴새없이 쏟아져
실언 한마디에 공든 탑이 와르르
品格이란 쌓이고 쌓인 말(口)의 탑
세 원숭이의 경고 다시 새겨볼 때

정순민 문화대기자
정순민 문화대기자

오래전 일본 중부 소도시 닛코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을 보지 않고서는 일본을 봤다고 말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닛코의 풍광은 아름답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쇼구(東照宮)는 물론 일본 3대 폭포의 하나인 게곤폭포, 산중 호수 주젠지코 등 볼거리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은 도쇼구 내 작은 마굿간 앞이다. 이 마굿간 처마 아래 조각된 세 마리 원숭이, 즉 산자루(三猿)를 보기 위해서다.



세 마리 원숭이는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을 하고 있다. 한 마리는 양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다른 한 마리는 두 귀를 가렸다. 또 다른 한 마리는 오른손으로 입을 막고, 왼손으로는 오른손을 꾹 누르고 있다. 이 모습은 '논어' 안연편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제자 안연이 인(仁)에 대해 묻자 공자는 "자기를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예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공자님 말씀을 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아니, 어쩌면 인류는 지난 수천년 동안 이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지 모른다. 특히 누구나 자신의 말과 생각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우리는 지금 말이 너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사이 쏟아진 SNS 게시글과 댓글이 인터넷을 뒤덮고 있다. 정치인의 막말이 뉴스가 되고, 연예인의 경솔한 발언이 도마에 오르며, 익명 뒤에 숨은 악성 댓글은 누군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 여기엔 남과 여, 노와 소, 여와 야가 따로 없다. 모두가 말하고, 모두가 분노하고, 모두가 상대를 가르치려 든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는 말이 있다. 입은 재앙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말기 재상 풍도는 '설시(舌詩)'에서 "혀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칼"이라고 했다. 칼은 본래 남을 향해 휘두르는 것이지만, 말이라는 칼은 결국 자신을 먼저 베고 만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려 내뱉은 말 한마디가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고, 충동적으로 올린 SNS 글 하나가 공든 탑을 무너뜨리는 경우를 우리는 숱하게 봐왔다.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정치권의 막말 논란도 마찬가지다. 상대 진영을 향한 조롱과 비난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한순간의 실언이 정책과 비전을 집어삼키기도 한다. 그때마다 당사자들은 "진의가 왜곡됐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하지만 이미 시위를 떠난 말화살은 되돌릴 수 없다. 정치인만의 이야기도 아니다. 기업인은 과거 발언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유명인은 오래전 SNS 게시물 때문에 사과문을 올린다.

더 큰 문제는 SNS가 말의 속도를 너무 빠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실수로 한 말이 그 자리에 있는 몇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 정도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손가락을 몇 번만 움직이면 말과 글이 빛의 속도로 퍼져나간다. 말은 빨라졌지만 생각은 짧아졌다. 숙성되지 않은 말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트위터는 인생 낭비다"라고 말한 사람은 전설적인 축구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다. 그는 웨인 루니가 SNS에 막말을 쏟아내며 물의를 일으키자 "인생에서 트위터 말고 할 수 있는 게 백만가지는 있다"고 말했다.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기업 구글을 이끌었던 에릭 슈밋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인생은 반짝이는 모니터 속에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하루 한 시간쯤은 스마트폰의 전원을 끄라고 권유했다. 역설적이게도 디지털 시대를 이끈 사람들이 디지털 과잉을 가장 먼저 경계한 셈이다.

옛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과언무환(寡言無患), 말이 적으면 근심이 없고, 신언무우(愼言無尤), 말을 삼가면 허물이 없다고 여겼다. 생전의 법정 스님은 "사람은 모두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태어난다"며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하여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고 했다. 한 사람의 됨됨이를 뜻하는 한자 품(品)은 입 구(口) 세 개가 쌓여 이뤄진 글자다. 품격이란 결국 쌓이고 쌓인 말의 탑이라는 얘기다.


도쇼구 마굿간 처마 아래 세 마리 원숭이는 오늘도 묵묵히 같은 모습으로 전 세계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하나는 눈을 가리고, 하나는 귀를 막고, 하나는 입을 막고 있다.
사람들은 산자루를 관광명소쯤으로 여기지만 어쩌면 그 원숭이들은 수백년 동안 같은 경고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지도, 듣지도 말 것까지야 없지만 본 것을, 들은 것을 모두 말할 필요는 없다고.

jsm64@fnnews.com 정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