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읍시다] 자유주의자의 그람시 읽기
그람시에게 배우는 대한민국 보수 재건 전략
느림·반복·축적 통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라
우파가 회복해야 할 것은 '인내'와 '설명 능력'
[파이낸셜뉴스] 한국의 보수 우파는 취약하다. 2000년대 들어 이명박 전 대통령이 5년 임기를 마쳤을 뿐, 박근혜 전 대통령은 4년, 윤석열 전 대통령은 3년 만에 내려왔다. 그것도 박근혜·윤석열 두 대통령은 자기 속한 당내 분열과 배반, 야당, 시민단체, 좌파 언론의 합작 공세로 탄핵당했다.
1997년 대선 이후 우리나라에선 좌파가 4번, 우파가 3번 정권을 잡았다. 지금 상태라면 2030년 대선에서 우파가 집권하더라도 그 정권을 5년동안 제대로 보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정광제 자유주의작가회의 사무총장이 최근 쓴 이 책은 이런 실천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1891~1937년)가 감옥에서 완성한 '헤게모니(hegemony)' 이론과 '진지전(陣地戰·war of position)' 이론을 빌려 실전 방략을 탐구한다.
그람시는 '헤게모니'라는 개념에 대해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어떤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태"라고 정의내렸다. 저자의 말이다.
"총칼로 강제하지 않아도 사람들 스스로 그 질서를 지키고 재생산한다면 그 사회는 안정된 지배 상태에 있으며, 이것이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다. 헤게모니는 강제(coercion)이 아니라 사회의 동의(consent) 형태로 작동한다."(14쪽)
중요한 것은 강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게 사회에 스며들어 지배적 문화이자 상식이 된 '동의'를 만든 방법이다. 저자는 그람시의 '진지전'이 핵심 전략이라고 본다. '진지전'은 '기동전(機動戰)'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쿠데타, 혁명, 선거에서의 승리 같은 것이 '기동전'이라면, 사람들의 상식, 가치 판단, 세계관을 서서히 변화시켜 그 사회의 주류적인 문화로 만드는 것이 '진지전'이다.
"기동전은 빠르고 직접적인 공격이다. 선거, 정책, 법 개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면 진지전은 느리고 간접적이다. 교육, 문화, 언어, 상식의 층위를 하나씩 점유해 나가는 과정이다."(15, 20쪽)
"기동전의 목표는 권력이고, 진지전의 목표는 동의다. 권력은 빼앗을 수 있지만 동의는 빼앗을 수 없다. 동의는 축적되고 학습되며 반복을 통해 형성된다. 사람들은 강요받았다고 느끼는 질서에는 반발하지만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 질서에는 순응한다. 진지전은 바로 이 심리를 겨냥한다."(25쪽)
한국의 우파가 무기력해진 큰 이유 중 하나는 이 진지전에 무관심한 채 역량을 쏟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한국사회에서 진보 좌파가 강했던 이유는 도덕적으로 더 착해서가 아니라, 이 구조를 이해하고 오래 붙잡았기 때문"이라면서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전선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 전선을 떠받치는 진지를 다시 쌓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보좌파 성향 영화 감독인 박찬욱이나 봉준호 같은 이가 왜 보수우파에는 없냐고 보수우파 진영이 한숨만 쉴 때가 아니며 '자발적 동의'에 의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전방위 노력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책의 백미(白眉)는 '30년 진지전 로드맵'을 제시한 부분(235~262쪽)이다. 그는 1단계 '진지 구축'을 시작으로 '연결과 확산'(2단계), '헤게모니 고착'(3단계)이라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모든 시작은 어렵다(Aller anfang ist schwer)"는 독일 속담처럼 가장 힘든 일은 1단계이다.
저자는 "우리가 1단계에서 해야할 일은 새로운 지식인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보수우파) 지식인을 식별하고 연결하는 것이다. 진지 구축의 첫 단계는 보수우파 지식인들의 고립을 끝내는 일"(236쪽)이라고 했다.
그는 보수우파 지식인을 도덕적 투사 또는 카리스마 있는 논객으로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얼굴보다 검색하면 늘 같은 구조로 정리된 글을 꾸준히 제공하는 설명자 같은 지식인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식인은 전사(戰士)가 아니다. 깃발을 들 필요도 없고 앞장설 필요도 없다. 단지 자리를 지키며 설명을 반복하면 된다. 이 단순한 역할이 지켜질 때 나머지 진지는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30년 진지전은 여기서 시작된다. 조용하게, 그러나 가장 단단한 곳에서."(238쪽)
보수우파의 진지전도 그람시의 말대로 '느림·반복·축적'을 통해 장기전의 각오로 접근하고 추진해야 성공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람시는 언어를 통해 시간을 벌었다. 당장 권력을 잡지 못해도 언어를 통해 미래의 사고를 준비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어는 가장 느리지만 가장 확실한 진지다. 눈에 띄지않게, 그러나 깊게 파고드는 진지. 지금 우리가 구축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언어의 토대다."(244쪽)
"일상화된 콘텐츠는 개인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특정 인물의 발언이 아니라 여러 창작자와 플랫폼을 통해 유사한 구조가 반복된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다. 한 사람이 떠나도 흐름은 남는다. 이것이 진지전의 안정성이다. 우리는 스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250쪽)
저자는 보수우파가 회복해야 할 것은 도덕적 우월감이 아니라 설명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정책과 제도를 선악(善惡)의 언어로만 말하면 사고(思考)는 멈춘다. 그러나 구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꾸준히 설명하면 사람들은 점차 판단의 기준을 바꾼다. 설명이 반복돼 상식이 되는 순간, 논쟁이 필요 없어지고 헤게모니는 고착된다. "(265쪽)
소수의 재능있는 개인에 만족하지 않고 보수우파 지식인들이 활동하며 이들을 연결하는 공간, 즉 지속가능한 구조를 만들어 한 세대 또는 두 세대에 걸친 '의지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우리 속담처럼, 현장에서 이런 의식과 목표를 갖고 우파 진지전을 기획·추진할 정치인과 정치 세력 등장이 절실하다. 보수우파와 2030 세대의 각성이 커지는 요즘, 보수우파 재건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볼만한 책이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