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각

[강남視角] 텍스트힙, 유행 넘어 습관 됐으면

파이낸셜뉴스
정명진 문화스포츠부장
정명진 문화스포츠부장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오픈런 도서전'이라는 말이 나왔다. 지난 24~28일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은 얼리버드 티켓이 5일 연속 매진됐고, 1인당 구매 한도를 49장에서 10장으로 줄여야 할 정도로 예매 경쟁이 치열했다. 매년 15만명 안팎이 찾는 행사가 또 한번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이 같은 인기에 힘입어 비슷한 시기에 작은 도서전인 서울제대로도서전, 거북목도서전, 서울한평도서전 등도 열렸다. 책이 안 팔린다는 출판계의 오랜 한숨이 무색할 정도다.

이 열기의 배경에는 '텍스트힙(Text Hip)' 현상이 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행위 자체를 멋지고 트렌디하게 여기는 문화다. 단순히 독서가 좋다는 차원을 넘어, 북카페에서 책 읽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인증샷을 SNS에 올리는 식으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다. 아이돌 팬덤에서 시작된 흐름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2024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확산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현상의 발생 배경이다. 한때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인식이 강했던 독서가 어떻게 '힙한' 자기표현 수단으로 뒤바뀌었을까. 전문가들은 역설적으로 독서 인구가 줄어든 현실에서 그 답을 찾는다. 책을 읽는 사람 자체가 희소해지면서, 책 읽는 모습이 오히려 지적이고 차별화된 이미지로 돋보이게 됐다는 해석이다. 과거에는 너무 흔해서 특별할 게 없던 행위가 모두가 영상 콘텐츠로 시간을 보내는 시대에는 거꾸로 '남과 다른 나만의 취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된 셈이다.

여기에 SNS 인증 문화가 기름을 부었다. 텍스트힙은 단순히 읽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고 공유하는 데까지 확장된다. 책 표지를 든 인증샷, 북카페에서의 독서 풍경, 마음에 든 문장을 캡처해 올리는 행위 모두가 콘텐츠가 된다. 이는 독서를 '결과'가 아니라 '과정의 전시'로 바꿔놓았다는 점에서 기존 독서 문화와 결이 다르다. 책을 다 읽었는지보다 책을 읽는 모습이 얼마나 그럴듯한지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도서전 풍경에서도 고스란히 확인된다. 굿즈를 사려는 줄, 사인회를 향한 인파, 다양한 연령대가 한자리에 모이는 모습은 분명 책에 대한 관심이 살아있다는 신호다. 한 출판평론가는 텍스트힙을 통해 10~20대의 독서 관심이 높아졌고, 굿즈는 이들의 문화 소비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고 짚었다. 출판사는 굿즈를 브랜딩 수단으로 활용하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 출판사와 소통하는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흥미로운 건 이 열기가 서점이라는 공간의 성격까지 바꿔놓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교보문고는 이성적 호감을 목적으로 번호나 SNS 계정을 주고받는 '번따'의 명소로 떠올랐다. 책 읽는 사람이 멋있어 보인다는 인식이 서점을 '헌팅 명소'로 만드는 다소 예상 밖의 부작용을 낳은 셈이다. 불편 신고가 이어지자 광화문점은 "낯선 대화나 시선으로 방해받지 않도록 배려해달라"는 안내문까지 내걸었다. 서점이 '힙한 만남의 장소'로 소비되는 모습은 텍스트힙 현상이 얼마나 폭넓게,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까지 퍼졌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다만 이 모든 흥행이 한번의 유행으로 그칠지, 독서 문화의 체질 변화로 이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텍스트힙이라는 현상이 더 많은 사람을 책으로 이끄는 입구가 될 수도 있지만, 정작 '몇 권을 읽었는가'보다 '얼마나 멋지게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가'에 그친다면 유행은 금세 시들 수밖에 없다. 인증샷을 찍던 손이 다시 책장을 넘기는 손으로, SNS에 올리는 한 줄 후기가 다음 책을 고르는 안목으로 이어질 때 텍스트힙은 비로소 유행이 아닌 습관이 된다.

이 같은 관심이 책장 안으로 들어가 오래 머물 수 있을까. 결국 중요한 것은 도서전의 흥행이 아니라 축제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이 다시 책을 펼치는 일상이다.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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