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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소리에 생사 갈린 한강 전선…95세 노병이 기억한 한국전쟁"

이병철 기자
파이낸셜뉴스
지난달 25일 미국 뉴저지 6·25전쟁 기념탑 앞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한국전 참전 용사 알베르토 곤잘레스.
지난달 25일 미국 뉴저지 6·25전쟁 기념탑 앞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한 한국전 참전 용사 알베르토 곤잘레스.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핑(Ping)."

쇳조각이 부딪히는 짧은 금속음.

1951년 한강 북쪽 전선에서는 그 소리 하나가 생사를 갈랐다. 미군이 사용하던 M1 개런드 소총은 마지막 탄환을 발사하면 빈 탄창이 튀어나오며 특유의 금속음을 냈다.

'핑'.

중국군은 그 소리만 기다렸다. "탄약이 떨어졌다." 재장전하는 몇 초를 노려 수백 명이 일제히 돌격했다.

"우리는 역으로 그 소리를 이용했습니다."

95세 한국전 참전용사 알베르토 곤잘레스는 두 손을 맞부딪치며 당시를 재현했다. "일부러 쇠를 부딪혀 '핑' 소리를 냈습니다. 중국군이 우리가 탄약을 다 썼다고 착각하고 뛰어나오면 그때 사격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75년이 흘렀지만 그 짧은 금속음은 아직도 그의 귀에서 끝나지 않았다.

뉴저지 소년, 해병이 되다

1951년 8월, 부산항.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아홉 살 청년이 배에서 내렸다. 그때까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먼 여행이라고는 뉴저지에서 코네티컷까지가 전부였다. 다른 주에 가는 것조차 특별한 일이던 시절, 그는 태평양을 건너 지도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나라, 한국에 도착해 있었다.

미국에서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징집 대상이 됐다. 곤잘레스는 기다리지 않았다. 자원입대였다. 해병대는 전원이 지원자로 이루어진 부대였고, 훈련 강도가 가장 셌다. "어차피 군대에 가야 한다면 내가 원하는 부대를 선택하는 게 낫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해병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고, 그는 어릴 때부터 여행을 꿈꿨다.

"그전까지 가장 멀리 가본 곳이 뉴저지에서 코네티컷이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자동차로 두 시간 남짓 거리.

그것이 그의 세계 전부였다. 한국전쟁은 그에게 전쟁이기 이전에 처음으로 세상을 만나는 문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다. "학교에서는 한국이 일본의 일부였다고 배웠습니다." 한국은 미국인들에게 너무나 낯선 이름이었다.

두려움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으니, 위험도 당연히 감수해야 할 몫이었다.

부산항에서 본 첫 번째 한국

몇 주 뒤 배가 부산항에 들어왔다. 그가 가장 먼저 본 것은 전쟁도, 총도 아니었다.

항구 노동자들이었다. 밧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거대한 선박을 오르내리며 짐을 나르는 한국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장비를 사용했지만 한국 사람들은 손으로 모든 걸 했습니다."

그 풍경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도시를 벗어나자 끝없이 이어지는 초가지붕과 논. 비포장길.

검은 갓을 쓴 마을 어른. "검은 갓을 쓴 촌장이 지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 그 존경의 무게가 낯설면서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미군 트럭을 향해 달려오는 아이들. 아이들은 사탕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아이들 중 상당수가 부모의 지시로 나왔고, 받아간 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아 가족의 생계를 이었다는 것을." 전쟁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그러나 전쟁으로 더 선명해진 가난이었다.

강 하나 사이로 오간 죽음의 그림자

그의 부대는 김포와 강화도, 한강 하구 최전선에 배치됐다. 북한군 진지까지는 1마일도 채 되지 않았다.

곤잘레스가 한국에 도착한 1951년 8월은 한국전쟁의 양상이 크게 바뀌던 시기였다. 서울을 놓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던 기동전은 사실상 끝났고, 같은 해 7월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굳어졌다. 그러나 협상이 시작됐다고 총성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휴전선이 어디에서 그어질지가 당시 점령 지역에 따라 결정될 가능성이 커지면서 양측은 고지 하나, 강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더욱 치열하게 싸웠다. 군사사에서는 이 시기를 '휴전을 위한 전쟁'으로 부른다.

김포와 강화도는 서울과 인천을 지키는 한강 하구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유엔군과 북한군·중국군 진지가 마주했고, 가장 가까운 곳은 불과 1~2㎞ 거리였다. 낮에는 포격과 저격이 이어졌고, 밤이면 북한군과 중국군 침투조가 작은 배와 고무보트를 타고 강을 건너왔다. 미 해병대와 국군은 강변 곳곳의 전초기지에서 이를 막아냈고, 병사들은 밤마다 숲과 강변을 수색하며 침투를 차단했다.

"강 하나만 건너면 적이었습니다. 거의 매일 교전했습니다."

곤잘레스의 기억은 당시 전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당시 중국군은 정면 돌파보다 야간 공격을 선호했다. 북한군이 먼저 공격해 미군의 탄약을 소모시키면 뒤에서 대기하던 중국군이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전술을 자주 사용했다. 미군 병사들 사이에서는 M1 개런드 소총이 마지막 탄환을 발사한 뒤 빈 탄창이 튀어나오며 내는 '핑(Ping)' 소리를 중국군이 재장전 신호로 삼아 돌격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졌다.

곤잘레스 역시 그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는 역으로 그 소리를 이용했습니다."

일부러 쇳조각을 부딪혀 '핑' 소리를 낸 뒤 중국군이 뛰어나오면 그때 사격했다는 것이다.

"죽는 걸 알면서도 계속 앞으로 왔습니다."

그는 지금도 그 장면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미국 뉴저지 포트리 예비군 회관에서 만난 곤잘레스 알베르토 한국전쟁 참전 용사.
미국 뉴저지 포트리 예비군 회관에서 만난 곤잘레스 알베르토 한국전쟁 참전 용사.

신발로 적을 구분하던 전선

또 하나 어려웠던 것은 적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남한군과 북한군은 얼굴도, 말도 비슷했다.

결국 병사들은 신발을 봤다. 국군은 비교적 새 운동화를 신었지만 북한군은 낡은 신발이나 전사자의 군복을 입은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신발을 보고 적을 구별했습니다."

얼굴과 복장만으로는 남한군과 북한군을 구별하기가 몹시 어려웠다는 것이다. 전사자의 군복을 그대로 걸친 북한군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군은 신발을 봤다. 국군은 비교적 새 운동화를 신었고, 북한군은 낡고 해진 신발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신발 밑창 하나로 갈렸다.

"사람이 죽는 건 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합니다." 처음에는 무서웠다. 하지만 전쟁은 오래가지 않아 죽음을 일상으로 만들었다. 친했던 전우가 다음 주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는 일은 흔했다.

전차 밖으로 나가야 했던 밤

그는 전차병이었다. 낮에는 두꺼운 철갑 안에서 화력 지원을 했지만 밤이면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군 침투를 막기 위해 전차 밖으로 나와 보병들과 함께 숲과 강변을 수색해야 했다. 당시 미군 피해 상당수는 야간 침투와 매복 과정에서 발생했다. 중국군은 어둠을 틈타 움직였고, 병사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도 낮의 포격보다 밤의 적막이었다.

그에게 어떻게 공포를 견뎠느냐고 묻자 그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사람이 언제 죽는지는 적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그 믿음 하나가 그를 버티게 했다.

"내 차례가 아니면 살아남는 것이고, 차례가 왔다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차례가 아니면 살아남고, 전우가 떠났다면 그의 시간이 온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그를 공포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게 붙들어줬다.

동상과 말라리아, 그리고 이름 없는 한국 사람들

그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총알이 아니었다.

추위였다. 동상에 걸렸다. 지금도 후유증이 남아 있다.

여름에는 말라리아에 걸렸다. 김포의 논에서는 모기가 끝없이 올라왔다.

그럼에도 그는 "왜 내가 이 나라를 위해 싸워야 하나"라는 회의는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을 위해 싸웠다기보다, 미국 정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해병으로서 임무를 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담백하지만 단단한 말이었다.

전선 밖의 삶도 있었다. 강가에서 한국 여성들이 돌로 미군의 군복을 빨아주면, 그 대가로 미군은 식량과 초콜릿, 담배를 건넸다. 달러를 자유롭게 쓸 수 없던 시절, 먹을 것이 곧 가장 확실한 화폐였다.

휴전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단언한다. 한국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단지 총성이 멈췄을 뿐이라고. 평화협정이 아닌 휴전 상태가 70여 년째 이어지고 있을 뿐이라고.

판문점의 흰 선 하나. 그 선을 넘으면 곧바로 정치적 문제가 된다. 하지만 그는 선 자체보다 그 땅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국경은 사람이 그은 것이지만,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는 것이다.

제대 후 그는 원래 다니던 사진 제판 회사로 곧장 복귀했다. 입대로 비워둔 자리를 회사가 그대로 남겨뒀던, 참전 군인을 존중하던 시절의 미국이었다. 이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재소집 위기가 있었지만, 다행히 다시 전장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폐허 위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나라

그는 한국 전쟁 참전 후 일곱 차례 한국을 다시 찾았다. 아내의 손을 잡고 자신이 싸웠던 나라를 함께 걸었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광경을 목격했다.

초가지붕뿐이던 나라. 논과 비포장도로뿐이던 나라.

세계 최고 반도체를 만들고 자동차를 수출하며 K팝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가 돼 있었다.

"정말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국은 이제 미국의 도움이 필요한 나라가 아닙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는 가장 오래 생각한 뒤 마지막 말을 꺼냈다.

"역사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기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전쟁을 견딘 세대.
굶주림을 버틴 세대.

평생 땀 흘려 나라를 다시 세운 세대가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그분들을 존경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95세 노병의 기억 속 한국은 여전히 초가지붕과 논, 부산항의 노동자, 한강을 사이에 둔 전선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하나 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모든 나라의 참전용사들도 함께 기억해달라는 부탁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큰 보람이고, 참전했던 이유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핑" 소리에 목숨을 걸었던 열아홉 살 소년은, 이제 아흔다섯의 노인이 되어 그날의 소리를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pride@fnnews.com 이병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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