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특파원 칼럼] 도쿄 아닌 워싱턴을 먼저 봐야

파이낸셜뉴스
서혜진 도쿄특파원
서혜진 도쿄특파원

"저는 향후 12∼15개월 안에 엔·달러 환율이 200엔까지 갈 수 있다고 봅니다."

지난달 초 일본 도쿄 마루노우치의 한 금융시장 간담회. 10여명의 기자들과 일본 경제와 환율 전망을 듣고 있었다. 시장에서는 "170엔도 가능하다"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그런데 30년 넘게 일본 금융시장을 지켜본 한 전문가가 '200엔'이라는 숫자를 던지자 현장에서는 믿기 어렵다는 듯한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기자들의 반응을 본 그는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신이 왜 외환 전망가를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기상 예보관이 덜 틀려 보이게 하려고 만든 겁니다." 회의실에 웃음이 번졌다. 환율 예측이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었다.

농담으로 잠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그는 이내 왜 그런 전망을 내놓았는지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은행은 금리 인상을 서두르지 않을 것이고 다카이치 사나에 내각의 확장재정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엔저를 떠받치는 두 축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얘기였다.

당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64엔에 근접하며 약 40년 만의 엔저를 기록했다. 일본 정부가 올 들어 11조엔 넘게 외환시장에 개입했지만 추세는 바뀌지 않았다.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개입은 시간을 버는 것일 뿐"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돌았다.

엔저가 이어질 것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미국이었다. "한때는 새로운 플라자합의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아메리카 퍼스트'를 그 이유로 들었다. 미국은 환율보다 자본을 선택했고 미 재무부가 정말 관심을 갖는 것은 외환시장이 아니라 국채금리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그 말은 미국이 일본의 엔화 방어에 적극 나설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의미로 들렸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한 달 후인 지난달 31일 미국과 일본은 28년 만에 엔화 매수 공동개입에 나섰다. 달러당 164엔에 근접했던 환율은 단숨에 155엔대로 내려왔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개입 자체보다 개입 방식이었다. 일본은 달러를 팔아 엔화를 샀지만 미국은 달러를 팔지 않았다. 그 대신 유로를 매도하고 엔화를 매수했다. 일본에는 미 연방준비제도의 해외·국제통화당국(FIMA) 환매조건부채권(Repo·레포)을 활용해 미 국채를 팔지 않고도 달러를 조달할 길을 열어줬다. 일본의 엔화 방어가 미 국채 매도로 이어져 장기금리를 끌어올리는 상황만은 막겠다는 의도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공동개입을 "우정의 신호"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금융시장이 읽은 메시지는 조금 달랐다. 일본은 도왔지만 달러는 팔지 않았고, 미 국채도 시장에 나오지 않도록 했다. 공동개입의 설계 자체가 미국의 우선순위를 보여줬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그 배경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지난 4일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많은 아시아 통화가 엔화와 연동돼 움직인다"며 "엔화가 약하기 때문에 한국 원화도 약하고, 중국도 위안화 절상에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이번 엔저를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금융시장 전체의 안정과 연결된 문제로 보고 있었던 셈이다.

이번 공동개입으로 엔저 추세가 끝났다고 보는 전문가는 드문 것 같다. 가타야마 사쓰키 일본 재무상도 개입 효과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있다.

다만 이번 공동개입은 엔화를 바라보는 기준 하나를 바꿔놓았다. 이제 엔화를 전망할 때 일본은행의 금리와 일본 정부의 재정정책만으로는 부족하다. 미 재무부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미 국채시장이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까지 함께 봐야 한다. 미국이 엔화를 더 이상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 금융시장 전체와 연결된 변수로 보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이제 엔화의 방향은 도쿄보다 워싱턴을 먼저 읽어야 할 때가 됐다.

[email protected] 서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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