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과 싸우지 마라"…채권시장이 美·日·韓 정부에 청구서 내밀었다 [쓸만한 이슈]
美 30년물 19년 만에 최고…재무부 바이백 확대에도 금리 반등
월가 전설 드러켄밀러 "5.5%면 받아들여야"…美 국가부채 경고
日 초저금리 공식도 흔들…韓 장기금리도 기간프리미엄에 상승
양적완화 종료에 국채 가격결정권 시장으로…'채권 자경단' 귀환
[파이낸셜뉴스] "채권시장이 말하게 하라."
월가의 전설적인 투자자 스탠리 드러켄밀러가 미국 정부에 던진 경고다. 미국의 장기국채 금리가 치솟으면서 재무부가 장기채 바이백을 확대하자 시장이 보내는 경고음을 인위적으로 낮추지 말라는 것이다.
그의 경고를 허투루 봐서는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최근 장기금리 상승이 미국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장기국채 금리는 수십 년 만의 높은 수준으로 뛰었고 한국의 10년·30년 만기 국고채 금리도 가파르게 올랐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도 마찬가지다.
각국의 사정은 다르지만, 시장이 던지는 질문은 비슷하다. '늘어난 정부 빚을 앞으로 누가, 얼마의 금리를 받고 사줄 것인가'다. 양적완화(QE)와 제로금리에 가려졌던 정부부채 비용이 다시 시장가격에 반영되면서 채권시장이 각국 정부에 '재정 신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드러켄밀러는 지난 2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채권시장이 말하게 하라(Let the Bond Market Speak)'라는 제목으로 내놓은 기고문에서 미 재무부의 장기국채 바이백 확대를 비판했다.
미 재무부는 지난 19일 10~30년물 국채 바이백 한도를 회당 최대 20억달러(약 2조 7688억원)에서 최소 40억달러로 확대했다. 미국 30년 만기 국채금리가 5.31%를 넘어서며 2007년 이후 최고 수준까지 치솟은 직후였다.
발표 직후 금리는 떨어졌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드러켄밀러는 최근 금리 상승이 시장 기능의 이상이 아니라 시장이 미국의 경제·재정 여건을 가격에 반영한 결과라고 봤다. 국채 거래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상황에서 장기채를 사들여 가격을 떠받치는 것은 유동성 관리보다 사실상의 '가격 관리'에 가깝다는 주장이다.
이번 비판은 드러켄밀러와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의 인연 때문에 더욱 주목받았다. 두 사람은 소로스펀드매니지먼트에서 함께 일했고 1992년 영국 정부의 파운드화 방어에 맞서 베팅했다. 당시 정부의 가격 방어에 맞섰던 베선트에게 옛 멘토가 34년 뒤 "시장과 싸우지 말라"고 경고한 셈이다.
드러켄밀러가 지목한 근본 원인은 미국의 재정이다.
물가가 연방준비제도(Fed)의 목표치를 웃돌고 고용도 견조한 상황에서 미국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6%에 달한다. 국가부채는 40조달러를 넘어섰고 순이자지출도 올해 1조1000억달러를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국채 공급은 늘어나는데 중앙은행이 과거처럼 대규모로 사들이지 않는다면 민간 투자자가 이를 떠안아야 한다. 투자자는 장기간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하고 이는 장기금리와 기간프리미엄 상승으로 이어진다.
드러켄밀러는 시장이 30년물 국채를 사기 위해 5.5%의 금리를 요구한다면 이를 억누를 것이 아니라 미국 재정에 대해 시장이 보내온 '청구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채 매입으로 금리를 낮추면 당장의 이자부담은 줄지만 재정개혁 압력도 약해진다. 결국 장기금리를 지속적으로 낮추려면 채권을 사들일 것이 아니라 재정적자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을 포함해 국가부채가 증가하는 국가들로선 드러켄밀러의 경고가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부채가 많은 국가일수록 금리 상승은 재정 부담으로 돌아온다. 재정적자 확대→국채 발행 증가→금리 상승→이자비용 증가→재정적자 확대의 악순환이 발생할 수도 있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4월 재정보고서에서 세계 공공부채가 2025년 GDP의 약 94%에서 2029년 100%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과거와 가장 큰 차이는 국채의 구매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이후 중앙은행들은 양적완화를 통해 막대한 국채를 사들였지만 중앙은행이 보유자산을 줄이면서 정부는 다시 가격과 위험에 민감한 민간 투자자에게 의존해야 한다.
국제결제은행(BIS) 역시 높은 공공부채와 재정압력이 과거보다 불리한 금융환경과 맞닥뜨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금리는 높고 성장률은 둔화하면서 정부의 부채 감당 능력은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변화가 극적으로 나타나는 곳이 '제로금리 국가' 일본이다. 일본은행(BOJ)의 대규모 국채 매입과 일본 내 풍부한 수요 덕분에 막대한 정부부채에도 초저금리를 유지해왔지만, 이 공식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일본 10년물 국채금리는 3% 선에 근접했다. 지난 20일 20년물 국채 입찰에서도 평균 낙찰금리가 3.698%까지 올랐다. 물가 상승과 BOJ의 통화정책 정상화에 재정정책에 대한 경계감까지 겹친 결과다.
한국도 글로벌 장기금리 상승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난 21일 국고채 10년물은 연 4.376%, 30년물은 4.703%까지 상승했다.
다만 이를 미국이나 일본처럼 곧바로 재정위험에 대한 경고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내 장기금리에는 통화정책 전망과 미국 등 해외금리, 국고채 발행물량, 투자자 수급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기채를 보유하면서 감수하는 금리·물가·수급 등의 불확실성에 대해 투자자가 요구하는 '기간프리미엄'이 중요해지고 있다. 원인은 달라도 장기채 보유에 대해 시장이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는 세계적인 흐름과 맞닿아 있다.
중요한 건 미국과 일본, 한국의 장기금리 상승을 관통하는 변화다. 금리의 가격 결정권이 중앙은행에서 시장으로 다시 이동하고 있다.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시대에는 중앙은행이라는 거대한 매수자가 정부의 자금조달 비용을 낮췄다. 이제 중앙은행이 물러난 자리에서는 투자자들이 정부의 부채와 물가, 재정 지속가능성을 평가해 금리를 요구한다.
과거 월가에서는 방만한 재정정책에 맞서 국채를 팔아 금리를 끌어올리는 투자자들을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이라고 불렀다. 중앙은행의 대규모 국채 매입으로 사라진 듯했던 이들이 다시 영향력을 키우는 모습이다. 정부가 낮은 비용으로 제한 없이 돈을 빌릴 수 있었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이다.
드러켄밀러가 미국 정부에 던진 "채권시장이 말하게 하라"는 경고가 미국만의 이야기가 아닌 이유다. 지금 세계 채권시장이 각국 정부에 내미는 청구서에 적힌 단어는 결국 하나다.
'신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