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21개 쏟아졌는데 한반도 상륙 '0'… '한국행 길' 왜 안 열렸나
1~8월 평년 13.5개보다 56% 많아
본지 분석 중국 7·일본 5·먼바다 9
기상청 공식 한국 영향은 장미 1개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가 진로 갈라
9월 평균 5.1개… 제주 안심 아직 일러
【파이낸셜뉴스 제주=정용복 기자】 올해 북서태평양에서는 8월 하순까지 태풍 21개가 발생했다. 평년 같은 기간 13.5개보다 55.6% 많고 평년 연간 발생량 25.1개의 83.7%를 이미 채웠다. 그런데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은 아직 한 개도 없다. 기상청이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영향 태풍으로 분류한 태풍도 6호 장미 1개뿐이다.
태풍을 만들어낼 만큼 바다는 뜨거웠지만 한반도로 이어지는 진로는 좀처럼 형성되지 않은 '2026년 태풍의 역설'이다. 올해 태풍의 이동경로를 보면 중국과 일본, 북서태평양 먼바다로 갈라지는 흐름이 뚜렷하다. 경로를 결정하는 북태평양고기압의 위치와 가장자리, 중위도 기압계가 한반도보다 중국이나 일본 쪽으로 태풍의 길을 만든 결과로 풀이된다.
다만 지금까지 태풍이 비껴갔다고 9월 이후까지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북태평양고기압의 위치가 달라지면 태풍이 이동하는 통로도 바뀔 수 있어서다. 평년 9월에도 북서태평양에서는 5.1개의 태풍이 발생한다.
■ 올해 21개 태풍의 행선지를 추적했더니
27일 기상청 태풍발생통계에 따르면 올해 태풍은 1월부터 8월까지 21개 발생했다. 월별로는 1~4월 각각 1개, 5월 2개, 6월 2개, 7월 5개, 8월 8개다.
평년에는 1~8월 13.5개가 발생한다. 올해는 평년보다 7.5개 많다. 연간 평년 발생량 25.1개와 비교해도 8월이 끝나기 전에 80%를 훌쩍 넘어섰다.
반면 우리나라 영향은 정반대다. 평년 한 해 우리나라에 영향을 주는 태풍은 3.4개지만 올해 공식 영향 태풍은 장미 1개다.
기상청에서 말하는 '우리나라 영향 태풍'은 반드시 한반도에 상륙한 태풍을 뜻하지 않는다. 2011년 이후 우리나라 태풍특보 구역에 태풍특보가 발효됐는지를 기준으로 판단한다.
태풍 장미는 지난 6월 2일 남해동부바깥먼바다에 태풍경보가 내려지면서 올해 첫 영향 태풍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한반도 육상에는 들어오지 않고 일본 남쪽 해상을 거쳐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제주와 남해안에는 너울 등의 영향을 줬다.
파이낸셜뉴스가 기상청과 일본기상청의 1~21호 이동경로를 토대로 주된 진로를 분류한 결과 중국 방향으로 이동한 태풍이 7개, 일본 방향이 5개였다. 나머지 9개는 필리핀·마리아나 부근이나 북서태평양 먼바다에서 약화하거나 한반도와 멀어진 경로를 탔다.
중국권에는 9호 바비와 10호 마이삭, 12호 노을, 13호 돌핀, 18호 사우델, 19호 나라, 20호 개나리가 포함된다. 일본권은 장미와 7호 메칼라, 8호 히고스, 15호 찬홈, 17호 낭카로 분류됐다.
경로 분류와 우리나라 영향 여부는 서로 다른 기준이다. 장미처럼 이동경로는 일본 쪽이면서 우리나라 해상에 태풍특보를 발생시켜 '한국 영향 태풍'으로 동시에 기록될 수 있다.
최근 상황도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18호 사우델은 27일 오전 3시 중심기압 960hPa, 최대풍속 초속 39m의 강한 세력을 유지한 채 북위 28.5도, 동경 125.3도 해상에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기상청은 사우델이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중국 동부 해안 방향으로 이동한 뒤 29일께 열대저압부로 약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한반도 남쪽까지 올라왔지만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제주나 남해로 향하지 않고 서쪽으로 이동하는 경로다.
■ 태풍 만든 뜨거운 바다, 진로는 고기압이 갈랐다
태풍이 많이 발생한 배경과 한반도로 오지 않은 이유는 구분해서 봐야 한다.
태풍 발생에는 바닷물 온도와 해양에 저장된 열, 대기의 대류 활동 등이 영향을 미친다. 기상청은 지난 6월 장미가 발생했을 당시 우리나라를 포함한 북서태평양의 해수면 온도와 해양 열용량이 평년보다 높아 열대저기압이 만들어지고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올해 태풍 발생 속도는 연초부터 빨랐다. 지난 5월 21일까지 이미 5개가 발생해 당시 평년 누적 발생량 2.5개의 두 배에 달했다.
하지만 만들어진 태풍이 어디로 이동할지는 주변 기압계가 좌우한다. 대표적인 변수가 북태평양고기압이다. 태풍은 거대한 고기압의 중심을 정면으로 뚫고 이동하기보다 고기압 가장자리의 바람을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중위도 편서풍과 기압골의 위치가 결합되면서 서쪽으로 갈지, 북쪽으로 올라갈지, 일본 동쪽으로 전향할지가 결정된다.
기상청도 지난 5월 여름철 전망에서 올해 태풍이 주로 일본 남동쪽 해상이나 대만 부근 해상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당시 기상청이 한반도 영향 가능성을 설명하며 꼽은 변수 역시 북태평양고기압이었다. 고기압 가장자리가 한반도 남쪽에 놓이면 태풍이 동중국해를 따라 북상할 수 있고, 고기압이 수축하면 일본 규슈 부근을 거쳐 한반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전망했다.
올해 8월 하순까지는 이런 '한국행 통로'가 지속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서쪽으로 향한 태풍은 중국 쪽으로, 북동쪽으로 방향을 튼 태풍은 일본이나 북태평양 쪽으로 갈라졌다.
따라서 '북태평양고기압이 태풍을 막았다'라기 보다는 북태평양고기압의 위치와 가장자리가 태풍이 이동할 수 있는 경로를 중국과 일본 쪽에 형성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 태풍 비껴간 기압계, 대신 폭염은 키웠다
흥미로운 대목은 태풍 진로와 한반도의 폭염이 같은 여름철 기압계와 연결돼 있다는 점이다.
기상청의 7월 기후분석에 따르면 하순에 북태평양고기압이 우리나라 남동쪽에서 점차 확장하면서 대체로 맑고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7월 전국 평균기온은 26.8도로 평년보다 2.2도 높아 역대 세 번째로 높았다. 특히 전국 열대야일수는 9.7일로 기상관측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된 1973년 이후 가장 많았다.
남부지방과 제주에서는 북태평양고기압 영향으로 맑은 날이 이어지며 강수량도 평년보다 적었다. 태풍을 한반도에서 비껴가게 한 대규모 기압 배치가 다른 한편에서는 뜨거운 공기를 머물게 하고 열대야와 폭염을 강화한 셈이다.
다만 태풍 경로와 폭염을 하나의 원인으로 바라봐서는 안된다. 태풍 진로에는 북태평양고기압뿐 아니라 중위도 기압골과 편서풍, 태풍 자체의 위치와 세력 등 여러 변수가 동시에 작용한다.
핵심은 같은 북태평양고기압이라도 어디까지 뻗어 있고 가장자리가 어디에 놓였느냐에 따라 한반도에는 폭염을 만들면서 태풍에는 다른 이동경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 9월 평균 5.1개… 제주 바다부터 신호 온다
문제는 태풍 시즌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기상청의 1991~2020년 평년 통계를 보면 북서태평양 태풍은 9월에도 평균 5.1개가 발생하고 10월에도 3.5개가 만들어진다. 한 해 전체 태풍의 3분의 1가량이 9~10월에도 발생한다.
9월로 접어들면서 북태평양고기압이 수축하거나 가장자리 위치가 달라지고 중위도 기압골이 남하하면 지금과 다른 진로가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8월까지 한반도 상륙이 없었다는 이유로 올해 태풍 위험이 낮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제주는 특히 상륙 여부만으로 태풍 영향을 판단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장미는 한반도 육상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제주 해안에 너울을 일으켰다. 사우델도 중심이 제주로 향하지 않는 가운데 27일 제주도남쪽바깥먼바다와 남동쪽안쪽먼바다에는 풍랑경보가 이어지고 있다.
태풍의 중심에서 수백㎞ 떨어져 있어도 강풍권과 너울, 높은 파도, 태풍에서 유입되는 수증기의 영향을 먼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27일 오전 위성영상에서도 사우델이 동중국해로 이동하는 가운데 19호 나라와 새로운 열대저압부가 북서태평양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다. 현재 공식 태풍 발생 수는 21개지만 추가 태풍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남아 있다.
올해 태풍의 역설은 명확하다. 태풍을 만들 수 있는 바다는 충분히 뜨거웠고 발생 속도도 평년을 크게 웃돌았다. 다만 지금까지 한반도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지 않았을 뿐이다.
남은 태풍철의 변수도 결국 '몇 개가 더 발생하느냐'만이 아니다. 북태평양고기압의 가장자리가 어디로 이동하고 중위도 기압계가 어떤 길을 만들지가 한반도와 제주에 더 직접적인 위험 신호가 된다.
[email protected] 정용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