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레드 테크' 몰려드는 동남아…'중국어 스펙 쌓기' 열풍

김준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취업 보증수표' 한국어에서 이동
베트남·태국 중국어 배우기 한창
하노이 어학원 수강생으로 가득
중국어학과 커트라인도 높아져
애플 공급망·BYD 생산기지 구축
中 기술기업의 진출 확대가 배경
높은 급여에 韓인재 유출 우려도

베트남 하노이 시내 한 대형 중국어 학원에서 강사가 초중등생을 대상으로 중국어 기본 한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김준석 특파원
베트남 하노이 시내 한 대형 중국어 학원에서 강사가 초중등생을 대상으로 중국어 기본 한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사진=김준석 특파원

【파이낸셜뉴스 하노이(베트남)=김준석 특파원】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 지역에서 부는 '중국어 열풍'이 심상찮다. 그동안 한국어와 일본어는 '취업 보증수표'로 통하며 주요 외국어로 인기를 끌었지만 이제 그 자리를 중국어가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미국의 대중국 규제 강화로 중국 첨단기업과 제조업들이 동남아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해당 지역에서 중국어 수요가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29일 본지가 찾은 베트남 하노이 시내 한 대형 중국어 학원은 강의실마다 수강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중국어 강의만 15년째 맡고 있다는 팜씨는 본지에 "강의를 시작한 이후 올해가 수강생이 가장 많은 것 같다"며 "기초·회화반은 물론 HSK(한어수평고시) 5·6급 등 고급반까지 정원을 꽉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최근에는 취업을 위해 중국어를 배우려는 학생이 크게 늘었다고 했다.

■중국어학과 1위… 대학 커트라인 역전

변화는 대학 입시에서 먼저 나타나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의 생산기지가 대거 들어서면서 한때 한국어학과가 '취업 보증수표'로 통했지만 올해는 주요 대학에서 중국어 관련 학과의 입시 경쟁력이 한국어를 크게 앞질렀다.

올해 하노이대 중국어학과 입학 커트라인은 34.35점으로 한국어과(34.10점)를 제쳤다. 하노이국립대 외국어대에서도 중국언어문화학과가 27.03점으로 한국어학과(24.69점)를 앞질렀다. 중국어능력시험인 HSK에서도 2025년 베트남 응시자는 14만6000여 명으로 1위를 차지했다.

중국어 전공자가 아닌 학생들의 움직임도 달라졌다. 하노이국립대 외국어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강사인 딘 투 화이 박사는 본지에 "예전에는 중국어과 학생들이 주로 수업을 들었다면 지금은 다양한 전공을 가진 학생들이 중국어를 배우러 들어온다"며 "취업을 위해 중국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확실히 늘었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채용시장선 중국어 영향력 더 커져

실제 채용시장에서도 중국어의 영향력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베트남 채용 플랫폼 잡오코(JobOKO)가 지난 2025년에 10개월간 58만1660건 이상의 채용공고를 분석한 결과, 중국어 능력을 요구한 일자리는 약 1만3000개로 전년보다 50%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어 인력 수요 증가 속도는 일본어의 약 2배, 한국어의 5배에 달했다.

태국에서도 중국어 열풍이 거세다. 대학 입시에서 중국어는 제2외국어 가운데 가장 많이 선택되는 과목이다. 2위인 일본어 선택자의 두 배를 넘어섰다. 중국어 교육의 저변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초·중·고교와 직업학교 등을 포함해 중국어 수업을 개설한 학교가 2000곳을 넘었고, 100만명 이상의 학생이 정규 교육과정에서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특히 중국 전기차 업체들의 현지 생산이 늘면서 자동차 기술·정비 등을 가르치는 직업학교를 중심으로 중국어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애플 공급망·전기차 공장 따라 중국기업 남하

베트남과 태국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중국어 열풍의 이면에는 중국 기술기업들의 '남하'가 있다. 미·중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하면서 중국 기업들은 미국의 규제를 피해 생산기지를 동남아로 분산시키는 동시에 현지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공급망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과거 섬유·신발 등 노동집약적 제조업을 중심으로 이뤄졌던 중국의 동남아 진출은 이제 전자·배터리·전기차·태양광 등 첨단산업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중국 본사와 현지 생산·조달망이 함께 내려오면서 동남아 산업현장에서 중국과 직접 부딪히는 면적도 넓어지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생산시설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의 대 베트남 FDI는 최근 2년간 신규 프로젝트 수 기준 1위를 유지했다. 애플 공급망의 주요 업체인 럭스셰어와 고어텍 등이 베트남 생산시설을 확대했고, 태양광 업체 트리나솔라와 전기차 업체 BYD·체리자동차 등도 현지 생산을 늘리고 있다.

태국에서는 중국 전기차 생태계의 이전이 두드러진다. BYD가 라용에 약 4억9000만달러를 투자해 연산 15만대 규모의 공장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창안자동차, GAC 에이온, 장성자동차, 체리자동차 등도 현지 생산에 잇따라 뛰어들었다.

■현지인력 쟁탈전… 중국어 인력 귀한 몸

중국 기업의 남하는 중국어를 구사하는 현지 인력은 물론, 이미 동남아 제조현장에서 경험을 쌓은 직원들까지 중국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확보에 나서면서 인재 쟁탈전도 격화되고 있다. 베트남 진출 중국 전자업체에서 근무 중인 화씨는 하노이 시내 중국어과를 졸업하기 전 이미 취업에 성공했다. 화씨는 "급여가 일반 베트남 기업의 2~3배에 달하는데다 인센티브가 있는 달에는 삼성보다 높다"면서 "회사는 아직도 인력이 부족해 공격적인 구인에 나서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베트남에서는 중국계 전자·부품 기업들이 생산·품질관리·공정기술 등 현장 경험을 갖춘 인력을 영입하면서 한국 기업들의 인력 유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중국 기업 입장에서는 현지 생산시설을 새로 구축하면서 인력을 처음부터 교육하는 것보다 이미 한국 기업에서 제조 경험을 쌓은 인력을 데려오는 것이 빠르고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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