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특파원 칼럼] 인재를 붙잡는 마지막 고리

파이낸셜뉴스
이병철 뉴욕특파원
이병철 뉴욕특파원

"퍼듀대 학생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학생이 이곳 인디애나에 남아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될지를 생각해 보세요." 최근 미국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서 기자를 만난 미치 대니얼스 퍼듀대 총장은 SK하이닉스와의 협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퍼듀대 공과대는 US뉴스앤드월드리포트 대학원 공학 랭킹 종합 4위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스탠퍼드대·버클리대 다음이다. 기계공학은 스칼라GPS 집계로 최근 5년 전미 1위다. 인재가 부족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졸업생들은 일자리를 찾아 인디애나를 떠났다. 최고 수준의 공과대조차 인재를 지역에 붙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니얼스 총장의 말은 이 흐름이 바뀔 수 있다는 신호였다.

계기는 SK하이닉스다. 40억달러 이상을 투자해 웨스트라피엣에 미국 첫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기지를 짓는다. 2028년 10월 클린룸을 완공하고 2029년 하반기 양산에 들어간다. 직간접 일자리 7000여개가 나온다. 인재를 키워도 그들을 고용할 일자리가 부족했던 도시에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의 일자리가 생기는 것이다.

대니얼스 총장은 새 일자리 상당수가 공장을 짓고 증설하고 설비를 관리하는 기술자의 몫이 될 것이라고 했다. 대졸 엔지니어 수백명의 취업에 그치는 얘기가 아니다. 퍼듀대는 커뮤니티칼리지 아이비테크와 손잡고 필요한 인력을 공급한다.

파급효과는 공장 담장을 넘어선다. 퍼듀대는 SK하이닉스를 지역 반도체 생태계의 '앵커 기업'으로 본다. 도쿄일렉트론(TEL),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램리서치 같은 글로벌 장비업체가 현지 사무실이나 연구팀을 둘 유인도 커진다. 대학의 연구 역량과 인재를 중심으로 협력업체가 모이는 구조다.

기업 하나가 들어오면 일자리는 그 기업에서 끝나지 않는다. 협력업체와 연구개발(R&D)이 따라오고 건설·설비·물류·서비스 수요가 생긴다. 사람이 모이면 주택과 식당, 상점이 필요해지고 소비와 투자, 세수도 늘어난다. 기업 유치가 산업정책을 넘어 인재정책이자 지역경제 정책인 이유다.

8년 전 취재가 겹쳐 보였다. 당시 '대한민국 러스트벨트를 가다'를 기획했다. 균형발전 예산을 쏟고 공공기관까지 지방으로 옮겼지만 청년들은 수도권으로 향했다. 지방 기업들의 고민도 사람이었다. R&D 인재를 구하기 어려워 본사는 지방에 두면서 연구소는 수도권에 둔 기업도 있었다. 기업은 인재가 없다고 수도권으로 가고, 인재는 좋은 일자리가 없다고 수도권으로 갔다.

8년이 지났지만 이 악순환은 익숙하다. 한국은 지방대학을 육성하고 혁신도시를 만들고 공공기관을 이전했다. 하지만 좋은 민간 일자리는 그만큼 따라오지 못했다. 대학이 아무리 우수한 인재를 길러도 지역에서 고용할 기업이 없다면 지방대학은 결국 수도권 기업에 인재를 공급하는 통로가 될 수밖에 없다.

웨스트라피엣이 보여주는 것은 기업이 무조건 먼저여야 한다는 게 아니다. 대학과 인재, 인프라가 지역경제의 토대라면 이를 실제 일자리와 투자로 연결해 인재를 붙잡는 마지막 고리는 기업이라는 사실이다.

좋은 기업이 들어오면 청년에게 지역에 남으라고 설득할 필요가 줄어든다. 일자리가 생기면 인재가 남고, 인재가 남으면 또 다른 기업이 들어올 이유가 생긴다. 반대로 이 고리가 빠지면 아무리 좋은 대학을 가진 지역도 인재를 다른 곳에 내주는 정거장에 머물 수 있다.

8년 전 한국에서는 기업이 인재를 따라 수도권으로 가는 악순환을 봤다. 이번 인디애나에서는 기업이 들어오자 인재가 지역에 남을 수 있는 선순환이 시작되는 현장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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