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극장가는 어땠을까… 박인환 영화평론 59편 들여다본다 [내책 톺아보기]
오동진 평론가가 전하는 명동백작들의 영화 이야기
박인환은 내게 너무 먼 사람이었다. 그는 1926년생이다. 나의 아버지가 1923년생이었다. 그러니 내 아버지 세대의 사람인 셈이다. 박인환은 내겐 저 멀리 있었던 사람이다. 게다가 그는 1956년에 죽었다. 그의 죽음 역시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역시 이렇게 떠들고 다녔다. 박인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모든 연재는 한번 시작하면 뒤로 돌아갈 수가 없다. 도서 '명동백작들의 영화 이야기'를 시작할 때 5회 분량의 목차조차 갖추지 못했다. 오히려 그렇게 계획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그가 영화평론을 쓴 것은 1956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 약 2년 남짓이었다. 남아 있는 평론은 총 59편이다. 처음 내 생각은 다소 얄팍한 것이었다. 59편의 글이 묶여 있으니 그걸 하나하나 읽고, 박인환의 1950년대식 영화평론을 2020년대식의 내 글로 바꿔 다시 써 보자는 것이었다. 일종의 메타 비평, 곧 비평에 대한 비평이 지금 쓰고 있는 '명동백작들의 영화 이야기'가 지닌 모토였던 셈이다.
당장 여러 의문이 떠올랐다. 저 글을 1953년 11월에 썼다면 한국전쟁으로 남북한(아니 정확하게는 조선인민군과 유엔군 그리고 중국인민지원군 간에) 정전협정이 체결(7월 27일)된 지 4개월 만이다. 전쟁 직후이다. 곳곳이 폐허가 돼 있었을 것이다. 물론 미 공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평양에 비하면 그나마 많은 곳이 살아남고 건재했을 것이다. 그래도 살 곳, 먹을 것, 입을 것이 극심하게 부족했을 때이다. 무엇보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외에 사람들은 관심을 그 어느 것에도 두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영화를 봤다는 것에 관심이 집중됐다.
좋다. 박인환이 영화를 봤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그때도 극장을 열었고 극장에 사람들이 갔었다는 얘기인가. 자. 또, 그렇다면 '젊은이의 양지' 같은 할리우드 영화를 누가 어떤 경로로 한국에 들여왔을까? 그때의 영화 수입선은 어떻게 이어졌을까. 수입 가격은 얼마였고, 극장 티켓은 얼마여서, 영화수입사들은 전쟁 직후에 돈을 벌었을까, 망했을까. 과연 그때의 극장가 풍경은 어떠했을까. 질문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갔다.
만약 편하고 비겁하게 박인환 영화평론집을 훑는 식의 얄팍한 메타 비평으로 써댔다면 말 그대로 59개의 글 하나하나를 검토하는 것으로 이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왠지 그것이 미진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읽기에 지겹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의 인생을 좀 추적해 보자. 내 식으로. 인생 견문록식으로.
과연 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지배적이었지만 그럼에도 결국 한 땀 한 땀 써낼 것이라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박인환이 내게 환생한다기보다 내가 박인환에게 빙의되는 느낌이었다. 지난 1년간 그의 영화평론과 문학평론, 산문과 번역소설(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바다의 살인』은 박인환을 통해 처음 알았다), 무엇보다 그의 시(詩) 세계라는, 망망대해 같은 우주를 유영하고 다녔다. '명동백작들의 영화 이야기'는 지난 1년간의 꿈같았던, 그러나 미흡하기 짝이 없는 그 여행기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