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 던진 흙덩이가 조각으로... 반세기 예술 실험의 모토 '우연' [Weekend 문화]
이강소 개인전 '일어나고 사라지는'
韓 현대미술 거장, 롯데뮤지엄에서
회화·설치·판화·영상 등 총 150여점
천에 감싼 미공개작 '유령조각' 주목
한국화 신작 '바람이 분다' 첫 공개
"예상하지 못한 것을 만나는 순간들"
흙덩이는 허공에 던져지고, 닭은 석고 가루 위를 걷는다. 캔버스의 오리와 사슴, 배는 붓질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가 여백으로 흩어진다. 조각 20여점은 흰 천에 싸인 채 윤곽만 내비친다. 이강소가 반세기 넘게 붙잡아온 것은 완성된 형상이 아니라 우연과 행위, 시간과 관계 속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이다.
롯데문화재단이 운영하는 롯데뮤지엄은 오는 11월 1일까지 개인전 '이강소: 일어나고 사라지는'을 연다. 1970년대 실험미술부터 최근작까지 회화·조각·설치·판화·사진·영상 150여점을 한자리에 모았다. 특히 조각과 판화를 대규모로 구성하고, 한국화·LED 신작과 미공개 조각도 선보인다.
전시는 작품을 연대순으로 늘어놓기보다 서로 다른 시기와 매체를 관통해온 행위와 흔적, 생성과 소멸의 문제를 따라간다. 전시명은 작품이 관객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는 작가의 예술관을 담았다.
전시장 들머리에서는 검은 붓질이 세 폭의 LED 화면을 가로지른다. 화면 사이의 틈은 감추지 않았고, 맞은편 거울은 그 형상을 한 번 더 불러낸다.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대표 회화 연작 '청명'을 원작과 같은 크기의 LED 화면으로 옮긴 신작이다.
1943년생인 이강소는 1969년 '신체제' 결성을 시작으로 AG와 에꼴드서울 등 1970년대 현대미술 운동에 참여했다. 1974년에는 대구현대미술제 창설에 힘을 보탰다. 회화와 조각을 넘어 설치·퍼포먼스·사진·영상으로 영역을 넓히며 작품을 행위와 시간, 공간이 빚는 사건으로 바라봤다.
전시 초반의 '던지기 조각' 30여점은 이런 태도를 압축해 보여준다. 작가는 형태를 세밀하게 다듬는 대신 날것의 흙덩이를 허공으로 던진다. 손을 떠난 흙은 속도와 방향, 중력, 바닥과의 충돌에 따라 예측하지 못한 모습을 얻는다. 같은 행위를 되풀이해도 결과는 매번 달라진다.
작가가 통제하지 않은 흔적은 회화에서도 이어진다. '청명', '무제', '섬에서' 등 대형 연작 11점에는 오리와 사슴, 배가 절제된 붓질 사이로 어렴풋이 떠오른다. 가까이 다가서면 형상은 흐려지고 물감과 붓이 지나간 자국이 선명해진다. 여백은 관객의 기억과 상상이 머무를 자리가 된다.
그간 캔버스와 아크릴 물감을 중심으로 작업해온 그는 '바람이 분다' 신작에서 화선지와 먹을 택했다. 한국화 형식을 시도한 작품으로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됐다. 재료는 달라졌지만 한 번의 몸짓과 그 뒤에 남은 흔적을 지켜보는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1970년대 작업으로 들어가면 우연의 몫은 더욱 커진다. 1975년 파리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무제-75031'에서는 닭이 석고 가루 위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작가가 그려낸 선이 아니라 닭이 걷고 머문 자취가 작품이 됐다. 창작의 주도권 일부를 살아 있는 존재와 시간에 건넨 셈이다.
낙동강변의 갈대를 전시장으로 옮긴 설치작품 '여백'도 만날 수 있다. 양쪽 거울 속에서 갈대밭은 실제 공간 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듯하다. 관객의 위치에 따라 풍경의 범위도 달라진다. 제갈공명의 여덟 가지 전술 배치에서 착안한 '팔진도'와 판화, 사진, 영상은 하나의 질문이 매체마다 달리 변주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시 후반부에서는 작품이 태어난 환경으로 시선이 옮겨간다. 작가가 사용한 대형 붓과 작업 도구, 사진과 기록물을 작업실에서 가져왔다. 철제 선반에는 흰 천에 싸인 조각 20여점이 놓였다. 작업실에서 조각을 감싸 보관하던 모습에 착안한 '유령조각'이다.
미공개 조각들은 천 아래 윤곽만 내비친다.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가려진 형상을 상상하는 일은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전시의 끝에서는 1973년 첫 개인전에서 발표한 '소멸'을 오늘의 공간으로 불러낸다. 당시 이강소는 명동화랑에 선술집의 탁자와 의자, 술잔을 들여놓고 일주일간 술집을 운영했다. 사람들이 머물고 막걸리를 마시며 나눈 대화와 시간이 작품을 이뤘다.
이번에는 당시 선술집을 그대로 복원하지 않고 한국의 마당 문화에서 착안한 평상 구조물을 마련했다. 관객은 이곳에 머물거나 서로 대화할 수 있다. 50여년 전 '소멸'에서 시작된 관계의 장이 새로운 사람과 시간을 만나 다시 작동한다.
전시가 묶어낸 이강소의 반세기는 '그리다'보다 '던지다', '걷다', '머물다' 같은 동사에 가깝다. 흙과 닭, 갈대와 관객이 작가의 의도만으로 정할 수 없는 장면을 만들고, 작품은 그때마다 새롭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이강소는 "돌아보면 나의 작업을 관통하는 질문은 결국 '예상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만나는가'였다"며 "이번 전시에서도 관객들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에 따라 작품을 자유롭게 바라보고, 저마다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장인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