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 쌓였는데 노후 월급은 '글쎄'…몸집 두 배에도 지갑은 불안
자본시장연구원 '퇴직연금 이슈브리핑'
"디폴트옵션, 자동운용체계로 개편해야"
[파이낸셜뉴스] 501조4000억원. 국내 퇴직연금에 쌓인 돈이다. 숫자만 보면 노후 준비는 제법 든든해 보인다. 하지만 성적표를 들여다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10년 평균 수익률은 2.64%, 연금으로 받는 비중은 16.5%에 그친다. 적립금은 불어났지만 은퇴 뒤 매달 들어올 '월급'으로 이어지는 길은 여전히 좁다.
4일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연구원에서 열린 '2026년 제1차 KCMI 이슈브리핑'에서는 이 같은 퇴직연금의 외형 성장과 노후소득 보장 기능 사이의 간극이 도마에 올랐다. '초고령사회 다층노후소득을 위한 퇴직연금제도 개편'을 주제로 나선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장기 분산투자로 운용 방식을 바꾸고, 가입자의 돈을 맡은 기관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 연구위원은 "규모만으로 노후소득보장 기능이 강화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물가상승과 은퇴 이후 장기간의 생활비를 고려하면 원리금보장상품 중심의 저축 관행만으로 충분한 규모의 연금자산 축적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상품 유형별 운용 성과도 격차를 보였다. 지난해 전체 퇴직연금 수익률은 6.5%였다. 실적배당형은 16.8%를 기록한 반면 원리금보장형은 3.1%에 머물렀다. 은퇴 시점에 따라 자산 비중을 조정하는 타깃데이트펀드(TDF)의 수익률은 13.7%로 집계됐다.
남 연구위원은 지난해 성과에 자본시장 호황의 영향이 반영됐다는 점을 짚으며 단기 수익률보다 장기적인 자산배분에 무게를 뒀다. 그는 "퇴직연금 운용의 관점을 저축에서 장기투자로 바꿔야 한다"며 "자산과 지역을 분산한 글로벌 포트폴리오로 위험을 관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운용 전환을 뒷받침할 과제로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개편을 꼽았다. 가입자가 운용 지시를 하지 않을 때도 적립금이 운용되도록 도입한 제도지만, 상품 선택을 전제로 하는 현행 구조로는 저수익 상품에 자금이 머무는 문제를 해소하기 어렵다는 진단이다. 디폴트옵션 적립금은 53조3000억원으로 늘었으나 안정형 비중이 85.4%에 달했고, 전체 수익률은 3.69%에 그쳤다.
남 연구위원은 "가입자가 다시 상품을 선택해야 하는 현행 옵트인(Opt-in) 구조는 한계가 크다"며 "사전지정운용제도를 TDF·TRF 중심의 실질적인 자동운용체계로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안으로는 별도의 운용상품을 선택하지 않은 가입자의 자산을 장기 자산배분 포트폴리오에 자동 배분하는 '옵트아웃(Opt-out)' 방식의 강화를 제안했다. 가입자가 원하면 다른 방식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되, 별도 선택이 없어도 장기 분산투자가 이뤄지도록 기본 운용 경로를 설계하자는 취지다.
운용 방식의 변화와 함께 이를 책임질 체계도 개편해야 한다고 봤다. 퇴직연금 적립금을 모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기금형 제도 역시 규모 확대보다 독립적인 의사결정과 전문성 확보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남 연구위원은 "기금형은 단순히 적립금을 모아 운용규모를 키우는 제도가 아니다"라며 가입자의 이익을 우선하는 수탁자책임을 강조했다. 전문적 운용과 이해상충 관리, 장기 성과평가가 작동하는 지배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설명이다.
기금 유형별 설계와 평가 기준도 구분했다. 공공형은 중소·영세 사업장과 취약계층의 가입 사각지대 해소 및 수급권 보장에, 비영리 연합형은 기업 간 연대의 지속성과 제도 확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봤다. 금융기관 개방형에는 민간의 운용 역량을 활용하면서 위험을 감안한 장기 수익률로 성과를 평가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다만 국민연금공단의 공공형 퇴직연금 시장 참여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기존 공공형 기금인 근로복지공단의 '푸른씨앗'과 비교해 수익률과 운용비용 측면에서 차별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다. 공적연금과 사적연금의 운용을 한 기관에 집중하는 것 역시 위험분산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기금형 도입과 함께 기존 계약형의 운용 개선도 주문했다. 확정급여(DB)형은 향후 퇴직급여 지급 부담을 고려한 자산배분과 전문기관의 일임운용을, 확정기여(DC)형은 디폴트옵션의 실효성 강화를 제안했다.
남 연구위원은 "금융기관의 전문성과 엄격한 수탁자책임을 통해 적립금이 안정적인 연금급여로 연결되는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 퇴직연금제도 개편의 궁극적인 목표다"라고 강조했다.
[email protected] 최두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