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하의 본초여담] 병자는 하나인데 의원 행세하는 이는 열이다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주>
옛날 한 고을에 장사를 크게 하는 거상(巨商)이 있었다. 거상은 고을의 유지로 아는 이들도 많았다. 그는 평소 몸이 튼튼하여 잔병치레가 없었는데, 어느 초겨울 갑자기 오한과 열이 나면서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거상은 며칠 푹 쉬면 낫겠지 하면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사흘째가 되자 열은 더 심해졌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숨도 가빠졌다. 입은 말랐으나 물을 많이 마시지는 못했고, 밥맛이 떨어져 죽 몇 숟가락도 넘기지 못했다.
가족들은 급히 마을의 의원을 불렀다. 의원이 거상의 얼굴빛을 살피고 혀를 본 다음 맥을 짚었다. 진찰을 마치고 나서 의원은 "처음에는 외감(外感)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사기(邪氣)가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더 깊어지기 전에 발산약을 써야겠습니다."라고 했다.
의원이 처방을 적으려는데, 사랑방 문이 열리면서 이웃에 사는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거상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고개를 저으면서 "열이 이렇게 높은데 이는 틀림없는 실열(實熱)이네. 빨리 찬 약을 써서 열을 세게 내려야 하네. 내가 이런 병을 한두 번 앓아봤나. 이런 병에는 찬 약이 제일이네."라고 했다.
잠시 뒤 친척 한 사람이 병문안을 왔다. 그는 거상의 축 늘어진 모습을 보더니 혀를 차며 "아이고 형님, 이렇게 기운이 없는데 우짭니까? 이건 분명 허증(虛症)이오. 인삼과 황기를 듬뿍 써서 원기를 보해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번에는 문병을 온 또 다른 사람이 끼어들며 "내가 보기에는 풍(風)입니다. 이렇게 온몸이 아프고 머리가 아픈 것이 어찌 풍증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아는 이도 이러다 중풍이 왔습니다. 빨리 풍약(風藥)을 써서 풍을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옆에 있던 이는 다시 고개를 흔들며 "풍이 아니라 기(氣) 때문이오. 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이니 걱정이 얼마나 많겠소. 기가 막혀서 열이 나는 것이오. 향부자나 진피 같은 것으로 기부터 풀어야 하오."라고 했다.
그날 저녁이 되자 사랑방은 마치 시장통처럼 되어 버렸다. 의원도 아닌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 누군가는 땀을 내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아니다. 땀을 내면 기가 더 빠진다."라고 했다. 또한 "설사를 시켜야 한다."고 하면 옆에서는 "그랬다가는 큰일 난다."라고 했다. "인삼을 써야 한다."고 하면 "열병에 무슨 인삼이냐."라고 대들었다.
거상의 가족들은 이 말을 들었다가 저 말을 들었다가 하면서 점점 불안해졌다. 거상의 부인이 의원에게 "의원님, 병문안을 온 사람마다 말이 이렇게 다른데 누구 말이 옳습니까?"라고 묻자, 의원은 "의원은 저 혼자이고, 병을 진찰한 사람도 저 하나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환자의 친구 하나가 곁에서 "의원이라고 언제나 옳겠소? 여러 사람의 말을 들어보는 것도 나쁠 것이 없지요."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가족들은 의원이 처방해 준 대로 약을 복용하지 못하고, 병문안을 왔던 사람들의 말대로 이런저런 처방을 해 보았다. 뜨거운 약을 써서 듣지 않으면 다시 찬 약을 쓰고, 허증에 쓰는 약을 써 보기도 하고 풍을 제거한다는 약을 써 보기도 했다. 약들은 고작 하루 이틀 만에 바뀌었다. 증상에 차도가 없으면 바로 변경한 것이다.
거상의 증상은 날로 악화되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거상이 위독해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특히 지난번 병문안을 와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며 처방을 했던 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거상은 정신이 흐려지면서 헛소리를 하고 숨까지 거칠어졌다. 그제야 가족들은 다급하게 의원을 다시 불렀다.
의원은 환자의 맥을 짚어 보고 얼굴빛이 굳어졌다. 의원은 "왜 그때 제 처방을 복용시키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병세가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처방을 다시 해야 합니다. 병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자칫 제명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의원은 다시 증상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처방을 새로 정했다. 가족들에게는 이번에는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이라고 단단히 일렀다.
며칠 동안 의원의 약을 복용하자 다행히 거상의 증상은 서서히 회복되었다. 숨도 편안해지고 열도 나지 않았으며 정신도 맑아졌다. 죽을 조금씩 먹기 시작하면서 기운도 돌아왔다.
그로부터 열흘쯤 지나 환자가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자, 그제야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병문안을 한다며 다시 찾아왔다. 그날은 의원도 와 있었다. 사람들은 다시 저마다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원이 단호하게 "병에는 허실(虛實)이 있고 한열(寒熱)이 있으며 표리(表裏)와 기혈(氣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허하다고 무조건 보하는 것이 아니며, 열이 난다고 무조건 차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풍(風)이라는 글자 하나, 기(氣)라는 글자 하나를 들먹인다고 병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사랑방이 조용해졌다. 의원은 다시 "물을 길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우물의 깊이를 논하고, 배를 타 본 적도 없는 사람이 뱃길을 가르친다면 누가 그 배에 몸을 맡기겠습니까? 병을 치료하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거상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고 의원의 처방대로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했다.
이처럼 집안에 환자가 한 명 생기면 주위의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은 갖가지 의견을 내놓곤 했다. 그 때문에 환자의 판단이 흐려져 누가 옳은지 알지 못하고 망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옛 의서에서는 병을 맡길 사람이라면 사람됨이 선량하고, 병의 깊고 얕음을 헤아릴 줄 알며, 방서(方書)를 깊이 탐구하고 고금의 의서를 널리 살핀 사람이어야 비로소 생명을 맡길 만하다고 했다.
<의부전록> 總論. <醫門法律> 清. 喻昌. 治病. 孫思邈曰:"世間多有病人親友故舊交游來問疾, 其人曾不經事, 未讀方書, 自騁了了, 詐作明能, 譚說異端, 或言是虛, 或道是實, 或云是風, 或云是氣, 紛紛謬說, 種種不同, 破壞病人心意, 不知孰是, 遷延未就, 時不待人, 歘然至禍, 各自散走." 此種情態, 今時尤甚. 是須好人及好名醫, 識病深淺, 探賾方書, 博覽古今, 方可倚任, 不爾大誤人事. (총론. 의문법률. 청. 유창. 병을 치하다. 손사막이 말하였다. "세간에는 병자의 친구나 교유하는 자들이 와서 문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사람은 일찍이 일을 경험하지 않았으며 방서를 읽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뽐내면서 명철하고 능한 척을 하여, 이단의 이야기를 하면서 혹은 허라 하고 혹은 실이라 하고 혹은 풍이라 하고 혹은 기라 하는 등 분분히 틀린 말을 늘어놓는데 갖가지로 같지 않으니, 환자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누가 옳은지 알지 못하고 망설이며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다가, 시간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아 갑자기 화가 이르면 각자 흩어져 달아난다." 이러한 상황은 지금 더욱 심하다. 모름지기 선량한 사람이자 훌륭한 명의로서 병의 깊고 얕음을 알고 방서를 깊이 탐구하며 고금의 것을 널리 열람해야만 비로소 맡길 만하며, 그렇지 않으면 인사를 크게 그르친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email protected]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