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재벌가로 온 '벚꽃 동산'에 美 언론 시선 집중…'완벽한 앙상블' vs '원작 정신 훼손' [박지현의 아트월드]
사이먼 스톤 연출, 19세기 러시아 고전을 21세기 한국 재벌가로 각색
WSJ "전도연·박해수 흠잡을 데 없는 연기…뉴욕 연극계 홀린 눈부신 출발" 극찬
NYT "재벌 설정이 인물 공감대 떨어뜨려…체호프 특유의 연민 실종" 아쉬움
[파이낸셜뉴스] 해외 명작을 한국적 맥락으로 치환해 글로벌 무대에 올리는 시도는 늘 신선한 충격과 원작 훼손이라는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서 있다. 안톤 체호프의 고전 명작 '벚꽃 동산'을 현대 한국의 재벌가 이야기로 각색해 뉴욕 무대에 올린 이번 연극 역시 그 치열한 논쟁의 중심에 섰다. 배우진의 압도적인 연기력과 무대 미술에는 찬사가 쏟아진 반면, 원작을 한국식으로 비튼 연출 방향을 두고는 현지 유력 매체 간의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오는 26일(현지시간)까지 뉴욕 맨해튼의 파크 애비뉴 아모리 극장에서 공연되는 이 작품은 호주 출신 연출가 사이먼 스톤이 각색했으며, 모든 대사가 한국어로 진행(영어 자막 제공)되는 파격적인 무대다. 스톤 연출은 원작에서 몰락하는 19세기 러시아 귀족 가문의 영지를, 대를 이어온 기업마저 잃을 위기에 처한 현대 한국의 굴지 재벌 '송씨 일가'로 치환했다.
그는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19세기 말 러시아가 겪은 급격한 신흥 계급의 부상과 격변의 감각을 21세기 한국의 역동적인 사회 변화와 세대 갈등에서 발견했다"고 각색 배경을 밝혔다. 작품은 올해 1월 서울에서 배우들과 대본 없이 캐릭터의 전사와 한국 사회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는 워크숍을 거쳐 완성됐다.
한편 미국의 주요 두 매체의 작품 평가는 완전히 엇갈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가을 연극 시즌의 숨 막히는 출발을 알린 경이로운 작품"이라며 스톤의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를 흠잡을 데 없다고 극찬했다. 특히 안주인 송도영(원작 라넵스카야/류바) 역의 전도연에 대해 "기존의 감정 과잉형 캐릭터를 탈피해, 영혼이 다른 곳에 있는 듯한 위축되고 조용한 모습으로 독창적인 해석을 내놨다"고 평가했다. 신분 상승을 이룬 사업가 황두식(원작 로파힌) 역의 박해수에 대해서도 "강렬하고 유쾌한 에너지를 발산해 절제된 전도연의 연기와 훌륭한 대조를 이뤘다"고 호평했다.
반면 NYT의 헬렌 쇼 평론가는 각색된 재벌 설정이 오히려 극의 몰입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쇼 평론가는 "가문의 재력을 '초대형 재벌' 수준으로 너무 부풀린 탓에 인물들의 몰락이 와닿지 않는다"며 "등장인물 모두를 껴안는 체호프 원작 특유의 따뜻한 연민 대신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 같은 차갑고 가혹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벚나무를 일제강점기 희생된 한국인들에 비유한 대사 등 흥미로운 요소들이 깊이 있게 다뤄지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 점에 아쉬움을 표했다.
연출에 대한 엇갈린 평가 속에서도 사울 킴 디자이너가 구현한 무대 세트에 대해서는 이견 없는 찬사가 쏟아졌다. 무대 중앙에 자리 잡은 2층짜리 하얀 유리 저택은 마치 장난감 산이나 피라미드처럼 설계되어, 인물들이 쇠락해 가는 자신들의 영지를 내려다볼 수 있게 해 극의 입체감과 세련미를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K-콘텐츠가 글로벌 무대의 주류로 부상한 지금, 우리의 정서로 재해석된 고전이 뉴욕 현지의 까다로운 평단에 이처럼 뜨거운 찬반양론을 끌어냈다는 것 자체로 유의미한 현상이다. 단순한 호평 일색을 넘어 원작의 본질과 변용의 경계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촉발했다는 점이야말로 이번 '벚꽃 동산'이 뉴욕 한복판에서 거둔 가장 흥미로운 예술적 성취일 것이다.
[email protected] 박지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