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서 터진 '10.9점'의 기적… 반효진·박하준, 열도 적막에 빠뜨린 은빛 총성 [나고야 AG]
탈락 위기 속 타임아웃 승부수, 마지막 1발로 일본에 0.4점 차 짜릿한 대역전극
'혼성전 사나이' 박하준, 파리올림픽 이어 또 한 번의 은빛 쾌거
반효진 첫 아시안게임서 멀티 메달… 금메달 중국은 세계신기록 작성
[파이낸셜뉴스] 사선에 선 두 사수의 호흡이 멈췄다. 과녁을 향해 뻗은 총구 끝에는 묵직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메달의 색깔, 아니 생존 여부가 걸린 벼랑 끝 승부. 점수 차는 0.8점이었다. 이대로라면 홈 코트의 이점을 등에 업은 일본에 밀려 3위로 주저앉을 위기였다. 하지만 그 순간, 한국 사격의 저력이 번쩍였다. 타임아웃으로 거친 숨을 고른 그들은 가장 완벽한 한 발로 대역전극을 만들어냈다.
한국 사격의 '현재' 박하준(KT)과 '미래' 반효진(대구공공시설관리공단)이 극적인 명승부 끝에 은빛 메달을 목에 걸었다. 두 선수는 22일 일본 아이치현 종합사격장에서 열린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사격 10m 공기소총 혼성 단체전 결선에서 총점 502.9점(반효진 252.6점, 박하준 250.3점)을 합작하며 2위에 올랐다. 비록 1위는 세계신기록(507.1점)을 작성한 중국에 내줬지만, 3위 일본(439.7점)을 상대로 연출한 막판 대역전극은 금메달 못지않은 짜릿한 전율을 선사했다.
결선 무대는 피 말리는 접전의 연속이었다. 본선 3위로 결선에 오른 한국은 첫 번째 시리즈에서 104.9점을 합작하며 2위로 산뜻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시리즈부터 일본의 맹추격이 시작됐다. 209.2점을 기록한 한국은 일본(209.4점)에 0.2점 차로 밀리며 3위로 내려앉았고, 선수당 15발을 마친 시점에도 순위는 변하지 않았다. 314.3점을 쏜 한국은 여전히 중국(315.7점)과 일본(314.9점)의 뒤를 쫓고 있었다.
진정한 승부는 하위권 팀이 탈락하는 단발 사격 구간부터였다. 인도가 4위로 짐을 싼 뒤 사선에는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만 남았다. 2위 자리를 놓고 반드시 일본을 넘어야 했던 한국은 첫 발에서 399.0점을 기록하며 일본(398.8점)을 미세하게 앞섰다. 하지만 두 번째 발에서 치명적인 위기가 찾아왔다. 반효진과 박하준이 각각 10.0점과 9.9점을 쏜 반면, 일본은 고득점을 쏴 경기를 뒤집었다. 한국은 일본에 무려 0.8점 차로 뒤처졌다. 사격에서 단 한 발을 남겨두고 0.8점 차이는 쉽게 뒤집기 힘든 큰 격차다.
그 순간 한국 벤치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타임아웃을 요청해 흐름을 끊고 두 선수의 요동치는 심박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재개된 마지막 사격, 사선의 적막을 뚫고 반효진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10.3점. 흔들림 없는 사격이었다.
이제 모든 시선이 박하준의 손끝으로 향했다. 엄청난 압박감 속에서 그가 방아쇠를 당겼고, 전광판에는 경이로운 숫자가 찍혔다. '10.9점'. 인간이 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만점이었다. 반면 심리적 압박을 견디지 못한 일본의 하나카와 나오키는 9.5점으로 무너졌고, 노바타 미사키가 10.5점을 쐈지만 역부족이었다.
최종 440.1점 대 439.7점. 불과 0.4점 차이로 순위가 뒤바뀌는 찰나, 차갑게 굳어있던 박하준의 얼굴에 비로소 환한 미소가 번졌다. 적지에서 홈팀을 침묵시킨 통쾌한 역전 드라마가 완성된 순간이었다. 이후 한국은 기세를 몰아 금메달 결정전에 나섰지만, 종전 세계기록(506.7점)을 뛰어넘은 중국(왕쯔페이·성리하오)의 가공할 만한 집중력을 넘지는 못하고 3.5점 차로 경기를 마쳤다.
그러나 이 은메달이 지니는 의미는 각별하다. '혼성전의 사나이' 박하준의 진가가 다시 한번 빛났다.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혼성전 동메달, 2024 파리 올림픽 혼성전 은메달에 이어 이번 대회까지 시상대에 오르며 큰 무대와 단체전에서 유독 강한 '강심장'임을 제대로 입증했다. 전날 남자 단체전 동메달에 이어 아시안게임 통산 5번째 메달을 수확하며 한국 사격의 간판으로 우뚝 섰다.
'무서운 신예' 반효진도 마찬가지였다. 생애 첫 아시안게임이라는 중압감 속에서도 여자 개인전 동메달에 이어 은메달까지 거머쥐며 단숨에 멀티 메달리스트로 도약했다. 최종 결과표에 새겨진 메달의 색깔은 은빛이었지만, 벼랑 끝에서 보여준 꺾이지 않는 투혼과 10.9점의 기적은 팬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남을 명장면이었다.
[email protected] 전상일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