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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무자', 400년 전 검객을 되살린 완갑[안승현의 8비트]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X세대' 아재의 게임 이야기

귀무자 검의 길. 캡콤 홈페이지 갈무리
귀무자 검의 길. 캡콤 홈페이지 갈무리

[파이낸셜뉴스]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4년쯤 태어나 1645년 죽은 일본 검객이다. 말년에 쓴 '오륜서'에서 그는 열세 살에 처음 승부를 겨뤘고, 스물여덟, 아홉 살 무렵까지 60여 차례 싸워 한 번도 지지 않았다고 적었다.

가장 유명한 싸움은 1612년 간류지마 결투다.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게 나타난 무사시가 배 젓는 노를 깎아 만든 목검으로 숙적 사사키 고지로를 쓰러뜨렸다고 전해진다. 사사키 간류로도 불렸던 고지로가 죽은 섬은 그의 유파를 따 '간류지마'로 불리게 됐다.

이런 이야기 상당수는 후대의 소설과 영화를 거치며 부풀려졌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전설인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어쩌면 바로 그 모호함 덕분에 무사시는 400년 동안 수없이 다시 태어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사시가 태어나고 8년 뒤, 바다 건너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터졌다.

지옥에서 돌아온 무사시
'귀무자'는 일본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인간과 괴물의 싸움을 그려온 캡콤의 액션게임 시리즈다. 반갑게도 정식 신작이 20여 년 만에 '귀무자 웨이 오브 더 소드'로 돌아왔다.

이번 작품의 무대는 에도 시대 교토다. 캡콤은 새 주인공으로 미야모토 무사시를 불러냈다.

게임 속 무사시는 어느 유파의 우두머리를 쓰러뜨리고 나오다 '환마'라는 괴물들에게 목숨을 잃는다. 지옥에서 눈을 뜬 무사시를 되살린 것은 흰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사내다.

사내는 쓰러뜨린 적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완갑'을 그의 팔에 억지로 채운다. 하지만 무사시는 이 힘이 영 못마땅하다. 제 손으로 얻은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구할 생각도 없다. 칼 한 자루를 들고 천하의 고수들과 겨뤄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같은 완갑을 받은 숙적 간류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무사시를 이기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혀 사람의 영혼까지 닥치는 대로 삼킨다. 400년 전 섬에서 맞붙었던 두 검객이 이번에는 요괴가 들끓는 교토에서 다시 칼을 겨눈다.

설정만 놓고 보면 황당한 이야기다. 그런데 막상 게임패드를 잡고 무사시를 직접 움직여보면, 캡콤이 왜 하필 그를 다시 불러냈는지 이해하게 된다.

사사키 간류. 캡콤 유튜브 채널 갈무리
사사키 간류. 캡콤 유튜브 채널 갈무리

칼끝이 보일 때까지
이 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공격 버튼을 얼마나 빨리 누르느냐가 아니다. 난이도는 '스토리'와 '액션' 두 가지지만, 어느 쪽이든 버튼만 연타해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적의 칼이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보고 받아내고, 흘려내고, 그 틈에 되받아쳐야 한다.

칼과 칼이 맞닿는 순간 불꽃이 튄다. 단순히 공격을 막는다기보다 두 힘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느낌에 가깝다.

적의 칼이 몸에 닿기 직전 먼저 베어 한 번에 끝내는 '일섬'은 이 시리즈를 대표하는 기술이다. 허용되는 순간이 워낙 짧아서 처음에는 죽고 또 죽는다. 그런데 계속 싸우다 보면 어느 순간 적의 칼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캐릭터의 능력치가 갑자기 오른 것도, 적이 느려진 것도 아니다. 내 손이 익은 것이다.

이 감각이 '귀무자' 전투의 핵심이다. 적의 움직임을 읽고 기다렸다가 한순간에 베어 넘기는 재미가 무사시라는 검객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게임 속 풍경도 아름답다. '바이오하자드' 시리즈에 쓰인 기술로 그려낸 교토의 골목과 기와지붕은 세밀하다. 비에 젖은 돌바닥과 어두운 골목, 목조 건물 사이를 칼 든 사내가 걸어간다. 게임이라기보다 옛 사무라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그런데 그 사내의 얼굴이 낯익다. 이번 귀무자 신작의 특별한 묘미가 여기서 시작된다.

필름 밖으로 걸어 나온 미후네
그 낯익은 얼굴의 주인공은 1997년 세상을 떠난 배우 미후네 도시로다.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오는 모습까지 영락없는 미후네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로 세계에 이름을 알렸고,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의 '미야모토 무사시' 3부작에서는 실제로 무사시를 연기했다. 그 1편은 미국 아카데미 명예상을 받았다.

캡콤은 미후네의 얼굴을 게임 속에 되살리기 위해 미후네 프로덕션과 오랜 협상을 벌였다. 얼굴만 빌린 것도 아니다. 뒷머리를 긁는 동작과 어깨를 들썩이며 걷는 모습까지 옛 영화 속 미후네의 몸짓을 게임으로 옮겨왔다.

귀무자 시리즈에는 원래 배우의 얼굴을 게임 캐릭터에 입혀온 전통이 있다. 1편은 금성무, 2편은 1989년 세상을 떠난 마쓰다 유사쿠, 3편은 장 르노였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 전통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죽은 무사시를 되살린 것은 게임 속 완갑이다. 세상을 떠난 미후네를 스크린 밖으로 다시 걸어 나오게 한 것은 캡콤의 기술과 연출이다.

이 대목에서 '귀무자'는 단순한 액션게임을 넘어선다. 과거의 인물과 오래된 영화의 기억을 끌어와 지금 세대의 콘텐츠로 다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미야모토 무사시. 캡콤 유튜브 채널 갈무리
미야모토 무사시. 캡콤 유튜브 채널 갈무리

우리에게도 필요한 완갑
일본은 떠돌이 칼잡이 한 명을 400년째 우려먹고 있다. 1930년대 요시카와 에이지가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미후네의 영화가 나왔다.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가 나왔고, 수많은 드라마와 게임이 뒤를 이었다.

하나의 우물을 깊게 파놓고 세대가 바뀔 때마다 다른 그릇으로 길어 올리는 셈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무사시라는 재료 자체가 특별해서만은 아니다. 역사 속 인물을 소설로 만들고, 영화와 만화로 옮기고, 다시 게임으로 변주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 콘텐츠의 경쟁력은 좋은 재료를 가지고 있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 재료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새롭게,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국 문화에서 가져온 수많은 소재가 세계적인 콘텐츠가 됐지만,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어낸 주체는 우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국에 이야기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게임을 만드는 기술이 모자란 것도 아니다.

'P의 거짓'이나 '붉은사막' 같은 작품은 한국 게임의 개발 역량이 더 이상 세계 시장의 변방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가진 역사와 인물을 얼마나 매력적인 이야기와 캐릭터로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느냐다.

무사시가 목검을 깎던 무렵, 바다 건너 조선에도 그 못지않게 극적인 삶을 산 인물이 수두룩했다.

우리에게 없는 건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이야기를 다시 살려낼 완갑이다.

[email protected] 안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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