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부 판사 4년, 법정 밖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것들[알쏭달쏭 소년심판]
판사라고 하면 대개 법대 위에 앉아 기록을 읽고 판결을 내리는 모습을 떠올린다. 필자 역시 그랬다. 10년 넘게 일선 법원에서 근무하면서 판사의 일은 결국 기록과 씨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년부 판사가 된 뒤,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법정 안에서만 재판을 해서는 제대로 된 소년재판을 할 수 없었다. 때로는 법복을 벗고 승합차에 올라타야 했고, 소년원과 보호시설을 직접 돌아다녀야 했다. 아이들이 어디에서 조사받고, 어디에서 생활하며, 우리가 내린 처분이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집행되는지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법관으로 근무했던 시절 중 가장 바쁘고, 가장 낯설었으며, 동시에 가장 생생했던 시간이 바로 그때였다.
필자는 2016년 2월부터 1년간, 그리고 2019년 3월부터 2022년 2월까지 3년간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모두 합하면 4년이다.
당시 전국에 3,000명이 넘는 판사가 있었지만 소년심판 업무를 맡고 있던 판사는 20명 안팎에 불과했다. 그중 형사재판 등 다른 업무를 겸하지 않고 오로지 소년심판을 전담했던 판사만 추리면 숫자는 훨씬 줄어든다.
게다가 소년부 판사는 보통 1년, 길어야 2년 정도 업무를 담당한 뒤 다른 재판부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필자가 4년 동안 소년재판을 맡았다는 것은 상당히 드문 경험이었다.
이 경험 덕분에 변호사가 된 지금도 소년사건과 학교폭력 사건을 적지 않게 맡고 있다.
그런데 요즘 관련 사건을 상담하다 보면 조금 걱정스러운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소년심판에서 가벼운 처분을 받는 방법', '소년부 판사가 중요하게 보는 세 가지', '이것만 준비하면 처분이 달라진다'는 식의 콘텐츠가 넘쳐난다.
물론 도움이 되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소년심판의 전체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몇 차례 보조인으로 사건을 경험한 것을 토대로 단정적으로 설명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소년심판은 일반 형사재판과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형사재판보다 직권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고, 소년부 판사가 조사절차부터 심리, 최종 처분, 이후 집행 과정까지 폭넓게 관여한다. 따라서 법정에 몇 번 들어가 본 경험만으로는 각 조사기관의 역할이나 처분 하나하나가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기 어렵다.
고백하자면 필자 역시 그랬다.
10년 넘게 일선 법원에서 판사로 근무한 뒤 소년부에 왔지만 첫해에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다. 소년부 판사 2년 차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각 기관의 역할과 처분의 효과, 하나의 조사명령이 이후 절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가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전문가는 그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보다 조금 아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특히 그 '조금 아는 지식'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른 사람에게 판매하기 시작할 때 더욱 그렇다.
소년부에 처음 부임했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출장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전까지 10년 가까이 재판을 하면서 현장검증을 제외하면 법원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소년부 판사가 되자 부임 초기 6개월 동안 거의 일주일에 하루씩 외부로 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보내려는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면서 어떻게 아이를 그곳에 보낼 수 있겠는가.
소년원, 소년분류심사원, 보호관찰소, 비행예방센터, 이른바 '6호 시설'로 불리는 아동복지시설, 수강명령 집행기관, 사회봉사 집행기관 등 대략 40곳이 넘는 기관을 직접 방문했다.
소년원처럼 1년에 한 차례 정도 방문하는 곳도 있었지만, 6호 시설 등은 집행감독을 위해 조금 더 자주 찾아가야 했다. 결국 1년 내내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외부기관을 방문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다.
처음에는 꽤 생소했다.
기존 판사 생활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록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햇빛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소년부 판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동료 판사 및 조사관들과 법원 관용 승합차를 타고 전국 곳곳의 시설을 찾아다녔다. 아이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방도 보고, 현장 직원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그 지역의 토속음식을 찾아 먹기도 했다.
당시에는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특별한 시간이었다.
소년부에 와서 또 하나 놀란 제도가 있었다.
'청소년 참여법정'이었다.
관내 여러 학교에서 비교적 모범적인 학생들을 선정해 참여인단을 구성하고, 이들이 경미한 비행을 저지른 소년의 심리에 참석해 소년부 판사에게 적절한 부과과제를 건의하는 일종의 참여재판 제도였다.
취지만 놓고 보면 그럴듯했다.
또래 학생들이 비행소년에게 조언하고, 참여 청소년들 스스로 공동체의 규칙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있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 취지였다.
그런데 실제 재판을 진행하면서 필자는 마음 한편이 계속 불편했다.
참여인단 학생들에게는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입시나 스펙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비행소년의 자리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쪽에는 학교에서 모범생으로 선발된 아이들이 앉아 있고, 다른 쪽에는 비행을 저질러 법정에 불려온 아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금수저 학생이 흙수저 학생을 평가하는 장면'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무엇보다 재판을 받는 소년과 보호자의 가정환경이나 개인적인 사정이 또래 학생들 앞에서 지나치게 노출되는 문제점도 있었다.
필자만 그런 고민을 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소년부 판사들이 점점 늘어났고, 지금은 사실상 거의 사문화된 제도가 되었다.
코로나가 멈춰 세운 무대, 온라인에서 다시 열리다
그러나 소년부에서 경험한 제도 중 필자의 기억에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청소년문화제'다.
서울가정법원, 수원가정법원, 인천가정법원, 춘천지방법원 등이 해마다 돌아가며 아동복지시설에 위탁된 보호소년들을 위한 문화제를 개최했다.
단순한 장기자랑 행사는 아니었다.
6호 시설에 위탁된 아이들 중 상당수는 가정에서 제대로 보호받은 경험이 부족했다. 그만큼 자존감이 낮은 아이들이 많았다.
몇 달 동안 춤과 노래, 악기 연주를 준비하고 큰 무대에 서는 경험을 통해 '나도 무엇인가 해낼 수 있다'는 감정을 한번이라도 느끼게 해주자는 것이 행사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필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수원가정법원 주최 제8회 청소년문화제는 원래 2019년에 열릴 예정이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한 해 미뤄지면서 2020년에 개최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2020년이었다.
코로나19가 세상을 멈춰 세운 바로 그해다.
문화제 준비가 시작된 2020년 5월만 해도 우리는 11월이면 코로나가 어느 정도 진정되지 않을까 기대했다. 1,0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까지 대관했다.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 해 7월쯤 되자 고민이 깊어졌다.
'이 행사를 정말 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할 수 있다고 해도 하는 것이 과연 맞을까.'
그러자 차라리 이번 기회에 청소년문화제를 없애자는 의견도 나왔다.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6호 시설의 아이들이 몇 달 동안 무대를 준비하고 수백 명 앞에서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인데, 코로나 때문에 그 기회를 완전히 빼앗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도 고민했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상황을 예측할 수 없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실행가능한 행사를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모든 6호 시설에 카메라를 투입하고 각 시설을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다원 생중계 방식의 온라인 문화제'를 제안했다.
지금이야 온라인 생중계가 흔하지만 2020년 당시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처음 제안했을 때 여러 걱정이 나왔다.
과연 기술적으로 가능하겠느냐.
화면 몇 개 연결해놓은 조잡한 행사가 되는 것 아니냐.
업체와 준비하다가 문제만 생기고 결국 행사를 망치는 것 아니냐.
아예 녹화방송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당시 박종택 전 수원가정법원장님이 다원 생중계 방식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셨다. 덕분에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행사를 구현할 업체를 찾기 시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뒤가 더 어려웠다.
업체 선정부터 쉽지 않았고, 업체를 결정한 뒤에도 매주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거의 매주 실무단 회의를 열었다.
회의를 하나 마치면 문제가 하나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가 두세 개씩 생기는 느낌이었다.
몇 번이나 '괜히 시작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최선의 방법이 불가능하면 차선의 방법을 택했고, 차선도 어렵다면 그다음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하나씩 문제를 해결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행사의 날이 왔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행사가 끝난 뒤 현장에서는 "오프라인 행사보다 오히려 더 재미있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각 시설의 아이들이 이동하지 않아도 되니 훨씬 많은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었고, 행사장에서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소년의 이탈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예상하지 못했던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에게 그날의 기억을 묻는다면 기술적인 성공이나 행사의 규모보다 다른 장면이 더 먼저 떠오른다.
당시 살레시오에 입소해 있던 아이들이 가수 라디(Ra.D)의 노래 '엄마'를 부른 순간이다.
60여 명의 아이들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목소리는 제각각이었다.
음정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조금 빨랐고, 누군가는 조금 늦었다.
그런데 노래가 절정으로 향하고 아이들이 일제히 '엄마'를 목 놓아 부르는 순간, 행사장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화면으로 지켜보던 다른 시설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판사들도, 조사관들도, 직원들도 말을 잃었다.
필자는 그 아이들 중 상당수가 엄마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알고 있더라도 함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마디가 더 아프게 들렸다.
'엄마.'
아이들이 무대에서 부른 것은 어쩌면 노래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필자도 결국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남들이 보지 않는 사이 슬쩍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행사가 끝난 뒤 정말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하지 못했던 말을 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훗날 변호사가 된 뒤 우연한 기회에 가수 라디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그에게도 그날의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신의 노래 한 곡이 어느 날 보호시설에 있던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 노래를 듣던 판사 한 명이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전화하게 만들었다고.
요즘처럼 날씨가 화창한 날이면 가끔 소년부 판사 시절이 떠오른다.
2019년 당시 소년1단독이었던 존경하는 윤웅기 부장판사님과 소년2단독이었던 필자는 법원 승합차를 타고 경기 남부 곳곳을 누볐다.
두 명의 판사가 경기 남부 전체의 소년사건을 처리해야 했으니 결코 편한 시절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필자의 법관 인생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쳤던 시기였다.
법정 안에서 한 아이의 잘못을 판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아이가 다시 돌아갈 곳을 고민했던 시간.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처분이 실제로 어떻게 아이의 삶에 작동하는지를 확인했던 시간.
그리고 어떤 아이에게는 벌보다 자신을 믿어주는 어른 한 명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던 시간이었다.
요즘 법원에 있는 판사들과 만날 때면 소년재판의 업무환경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집행기관과의 공조는 예전보다 쉽지 않게 되었고, 6호 아동복지시설의 정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시설에 위탁할 필요가 있는 아이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아이를 보내야 할 곳은 없는데, 보내야 할 아이들은 늘고 있는 상황.
소년부 판사에게 이보다 답답한 일도 드물 것이다.
늘어나는 사건과 부족한 시설, 점점 각박해지는 기관 사이의 관계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는 소년부 판사들이 한 아이의 기록을 붙잡고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이 아이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것인가.
보호관찰로 충분할 것인가.
아니면 당분간 가정에서 분리해 다른 보호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할 것인가.
소년재판은 잘못한 아이에게 몇 호 처분을 내릴지를 결정하는 재판만은 아니다.
때로는 그 아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재판이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여전히 소년부 판사들이 하는 일이 매우 어렵고도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열악해지는 환경 속에서도 오늘도 묵묵히 그 일을 하고 있는 전국의 소년부 판사들과 조사관, 집행기관 종사자들에게 오래전 그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김태형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 김태형 변호사는 가사∙상속 분야 전문가이다. 2007년 법관 임용 후 2024년 수원가정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17년간의 법관 생활을 끝내고 법무법인 바른에 합류했다. 김태형 변호사는 법관 시절 2012년부터 총 8년간 가사∙상속 및 소년심판 업무를 담당했다. 특히 법관 퇴직 전 5년(2019~2024)간 수원가정법원에서 가사소년전문법관으로 수많은 가사∙상속 관련 케이스를 처리하면서 이 분야의 전문성을 확보했다. 베스트셀러인 "부장판사가 알려주는 상속, 이혼, 소년심판 그리고 법원"(박영사, 2023)의 저자이기도 하다.
[email protected] 김영권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