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아빠는 왜 맨날 늦게 와?"…아버지가 되고서야 알게 된 그날의 대답 [그때 그 말]

전상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어릴 적 원망했던 아버지의 늦은 귀가, 어느새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나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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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밤 10시 30분. 아파트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불 꺼진 거실, 식탁 위 식어버린 반찬. 방 안에서는 아이의 고른 숨소리만 들려온다. 낮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이불 곁을 지키고 있다.

"아빠, 오늘은 일찍 올 거지?"

출근길, 바짓가랑이를 붙잡던 아이에게 "일찍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오늘도 지키지 못했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스친다.

"아빠는 왜 맨날 늦게 와?"

어린 시절, 내가 아버지에게 던졌던 그 서운함 섞인 질문. 수십 년이 흘러, 나는 그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되어 있다.

■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집 밖의 세상을 선택하는 사람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에 없었고, 밤늦게 돌아오기 일쑤였다. 운동회 날, 함께 공을 차주고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친구의 아버지가 부러웠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어떤 모멸감을 견디는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는지 어린 마음이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가끔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온 집안이 들떴지만, 그 시간은 언제나 턱없이 짧았다.

■ 주택담보대출의 무게감 … 어른이 되어 마주한 현실

시간은 참 묘하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던 아버지의 나이가 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뚜렷해진다.

월급날의 기쁨은 찰나다.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관리비, 보험료, 아이 교육비가 차례로 빠져나간 통장은 헐겁다. 젊은 날의 패기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이제 회사에는 내 자존심이 아니라 가족의 생계가 걸려 있다. 억울한 질책을 삼키고,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하며, 가족과의 약속을 미루면서까지 기어코 일을 끝마친다.

지친 퇴근길 지하철, 휴대전화 속 아이 사진을 보며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 불현듯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도 현관문을 열기 전, 오늘 하루만큼은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며 혼자 자책했을까. 물어본 적은 없지만,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버지였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종종 부모가 태어날 때부터 부모였던 것처럼 착각한다. 언제나 강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존재.

하지만 아버지도 한때는 꿈 많던 소년이었고, 처음 살아보는 인생에 서툰 어른이었다. 처음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의 환희 뒤에는, 이 생명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막막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식은 늘 완벽해야 할 '아버지'라는 외투에 가려진 그 짙은 불안을 읽지 못했다.

가족이었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언어는 달랐다. 아버지는 뼈 빠지게 일하는 것을 사랑이라 믿었고, 자식은 함께 눈을 맞추는 시간을 사랑이라 여겼다. 그렇게 엇갈린 채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늙었고, 자식은 어른이 됐다.

■ 오늘 밤,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대답

밤 11시. 내일 아침 아이는 또 물을 것이다. 이번에는 무조건 일찍 오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 대신, 아이의 눈을 보고 말해주려 한다.

"아빠도 너랑 많이 놀고 싶어. 오늘은 늦을 수도 있지만, 주말엔 꼭 같이 축구하자."

아버지의 헌신과 책임감은 뼈에 새기되, 내가 느꼈던 어린 시절의 결핍까지 대물림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부모가 된 자식이 윗세대의 희생에 건넬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보답일 것이다.

오늘 밤에는 평생 무뚝뚝했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볼 참이다.
"아버지, 예전에 회사 다니실 때 참 힘드셨죠?" 십중팔구 "다 그렇게 사는 거다"라며 덤덤히 받아넘기시겠지만, 이제는 그 투박한 대답 이면에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를 안다.

아버지가 유난히 늦게 돌아오던 수많은 밤. 어쩌면 아버지도 나만큼이나 일찍 집에 돌아오고 싶었을 것이다. 3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전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아빠,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email protected] 전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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