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각

[강남視角] 평탄하지 않은 평탄화

파이낸셜뉴스
안승현 건설부동산부장
안승현 건설부동산부장

어릴 적 일요일 저녁 무렵이면 어머니는 방바닥에 담요를 펴고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다리셨다. 깃, 소매, 등판, 앞판 차례로 다리미를 미시는데 한 번도 그 순서를 바꾸신 적이 없었다.

훗날 내 셔츠를 직접 다려보고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등판 주름을 힘주어 밀면 주름은 사라지지 않고 옆구리로 몰려간다. 옆구리를 펴면 겨드랑이로 숨는다. 주름은 없어지지 않는다. 자리를 옮길 뿐이다. 순서를 지켜야 주름을 안 다린 쪽으로 몰아내 옷 끝으로 빼낼 수 있다. 그 이치를 모르고 덤빈 탓에 셔츠 다섯 장을 다리고 나니 허리가 굽을 지경이었다.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최근의 서울 집값 흐름을 두고 '일종의 평탄화 작업'이라고 표현했다. 꼭대기이던 강남은 내리고 다른 곳은 살짝 오르니 다행스럽다는 취지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같은 현상을 '상향 평준화'라고 불러야 한다고 맞받았다. 대통령 말대로라면 서울 부동산 시장이 고르고 반듯하게 펴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과연 그럴까.

숫자만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 통계를 보면 강남·서초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지난해 6월 30억원 안팎에서 지난달 26억5000만원 선으로 3억4000만원가량 빠졌다. 같은 기간 노원·도봉·강북은 6억2000만원대에서 6억6500만원 선으로 4000만원 남짓 올랐다. 강남에서 빠진 돈이면 '노도강' 아파트 반채 값이다. 강동·광진·동작·마포·성동 등 이른바 한강벨트 5개 구의 평균가격도 15억원을 넘어섰다. 1년3개월 만에 강남과 한강벨트의 격차가 4분의 1쯤 줄어든 셈이다.

다만 '평균의 착시'를 경계할 필요는 있다. 압구정의 대형 평형 몇 채가 거래된 달과 그렇지 않은 달은 평균값이 수억원씩 출렁인다. 지난 9월 강남구에서 50억원 초과 거래 비중이 8월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강남 집값이 실제로 그만큼 내려앉은 것인지, 아니면 비싼 집 거래가 잠시 멈춘 것인지는 좀 더 따져봐야 한다.

분명한 건 등판을 힘껏 눌렀더니 옆구리가 불룩해졌다는 사실이다. 대출한도 6억원 제한에 고가주택 보유세 부담까지 겹치면서 강남 집값은 10주 연속 내림세를 탔다. 하지만 억눌린 수요는 증발하지 않고 한강벨트와 외곽으로 흘러갔다.

10·15 대책이 15억원 초과 주택의 대출만 조였으니 그 아래 가격대로 사람이 몰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시장에선 세금과 규제를 피하려는 이른바 '덜 똘똘한 한 채'라는 기묘한 신조어까지 나왔다. 똘똘하지 않아서 잘 팔리는 집이라니, 요즘 시장의 뒤틀린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에 전세난까지 기름을 부었다. 지난해 6월 초 2만6000건에 육박하던 서울 아파트 전세 매물은 현재 2만1000건 남짓으로, 5분의 1 가까이 줄었다. 전셋집을 구하지 못한 세입자들이 떠밀리듯 중저가 아파트 매수에 나서면서 '생존 매수'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내 집 마련이 투자의 수단도, 부푼 꿈도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됐다는 대목이 씁쓸하다. 노도강에 이미 집을 가진 이들에게 4000만원 상승은 반가운 숫자일지 몰라도, 이제 막 진입하려는 무주택자에겐 훌쩍 높아진 담장이다.

강남 집값이 3억원 넘게 빠졌다고 해서 그 돈이 서민 주머니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값은 강남에서 빠졌는데, 내 집 마련의 부담은 엉뚱하게 노도강에서 늘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격차 축소가 시장의 자연스러운 조정이 아니라 인위적인 규제가 만들어낸 결과라고 입을 모은다. 옷감의 결을 살피지 않고 다리미로 힘주어 누르기만 하면 주름은 다른 곳으로 도망가 더 깊은 골을 만든다. 서울 집값이 평탄해지고 있다지만,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길이 평탄해졌다는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어머니라면 달궈진 다리미를 내려놓고 구겨진 옷감의 숨부터 죽이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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