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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가 라면으로 바뀐 날…문정희의 시로 읽는 삶과 자유 [fn 북브리핑]

장인서 기자
파이낸셜뉴스

문정희 시선집 '처음 슬픔이 깨어날 때'
시집 6권에서 이병률이 고른 55편
몸·욕망·자유를 시의 언어로 풀어내

처음 슬픔이 깨어날 때/ 문정희/ 달
처음 슬픔이 깨어날 때/ 문정희/ 달

세계여행기 한 질이 라면 한 상자로 바뀐 날, 한 여성이 울음을 터뜨린다. 결혼반지를 팔 때도 참았던 눈물이다. 문정희의 시 '꿈' 속 장면이다. 가난은 끼니를 넘어, 책으로 낯선 세상을 만나던 이의 상상과 자유까지 파고든다.

문정희의 시선집 '처음 슬픔이 깨어날 때'(달)는 삶의 슬픔과 기쁨을 몸의 감각으로 길어 올린다. 이병률 시인이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등 시집 6권에서 55편을 골랐다. 1965년 고교 재학 중 '꽃숨'을 펴내고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의 언어를 다시 만나는 책이다.

■가난과 억압 너머, 몸의 언어
'꿈'의 연이가 결혼할 때 이불 보따리에 챙겨온 것은 김찬삼의 세계여행기다. 남편은 실업자인 문학청년이고 쌀독은 비어 있지만, 연이는 밤마다 책으로 세계를 여행한다. 생활 속 물건 하나를 통해 한 여성에게 허락된 삶의 폭을 묻는 셈이다.

자신의 삶과 몸을 스스로 말하려는 목소리도 선명하다. '어머니의 편지' 속 어머니는 딸에게 "네 목숨은 네 것"이라고 이른다. 마음과 몸에 타는 불을 모두 태우라는 당부에는 여성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으려는 태도가 담겼다.

김소연 시인은 추천사에서 문정희의 시를 "한국어가 여성의 몸을 스스로 말한 처음"이라고 짚었다.

개인의 자유는 시대를 향한 목소리로도 이어진다. '순은의 펜으로―이 땅의 시인을 위하여'는 숨통을 막는 힘과 부자유의 장마 속에서 시의 언어가 종소리로 일어서는 순간을 그린다. 문정희는 '시인의 말'에서 "혼돈과 상처는 모두 강렬한 시의 육체가 되어 돌아왔다"고 회고했다.

■기쁨과 고통을 함께 품은 시
'딸기를 깎으며'에서는 익숙한 과일 하나에도 상반된 감각이 포개진다. 아이들은 딸기를 먹으며 신의 솜씨를 느끼지만, 화자는 씻어도 씻기지 않는 독을 떠올리며 몸을 떤다. 칼로 딸기를 깎는 순간, 열매의 아름다움과 먹는 즐거움도 함께 베어지는 듯하다.

'삶의 옆구리'는 하루의 긴 시간을 일로 채워야 하는 생활을 돌아본다. 연애나 노래, 술 마시기도 여덟 시간을 이어갈 수는 없다는 푸념 끝에, 고통을 보자기에 싸고 끄르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펼쳐진다. 불평과 웃음이 섞인 어조 속에서 고통과 즐거움이 얽힌다.

'잘 가거라, 나비야'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생명을 바라본다. 시는 썩어 흙이 되는 일을 눈부시다고 말하고, 살아 있는 동안 뜨겁게 사랑하다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음을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유한함을 아는 마음이 지금의 사랑을 더 절실하게 만든다.

황인찬 시인은 추천사에서 삶의 고통을 알면서도 그것을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자세를 "부드러운 강함"이라 표현했다. 문정희는 "슬프고 아름다운 독자에게 이 시집을 드린다"고 적었다.

[email protected] 장인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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