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이 가라앉는 줄 알았다"…정전 후 한국 바다 지킨 91세 美 해군 노병<1950, 산 자들의 기억⑦>
정전 72일 만에 18세 나이로 해군 입대…레이더병으로 해상 경계
"8시간씩 함정·항공기 감시…전투배치 명령에 긴장"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태풍을 만났는데 바닷물이 군함 안으로 밀려들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 줄 알았어요.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행운입니다."
한국전쟁 정전 직후 미 해군에 입대해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복무했다고 밝힌 레이먼드 앨런 마고타(91)에게 70여년 전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전쟁의 포성은 멈췄지만 한반도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당시 18세였던 청년은 군함의 레이더 화면을 지키며 주변 함정과 항공기의 움직임을 감시했다고 회고했다.
마고타는 지난 7일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레이더로 배와 비행기를 추적했다"며 "함포 사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 모든 승조원이 정해진 위치로 이동했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뷰 이후 관련 자료를 확인해 자신이 승선했던 군함이 미 해군 중순양함 USS 볼티모어(CA-68)였다고 밝혔다. 마고타는 1954년 한국 근해에서 임무를 수행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마고타가 공개한 미 해군 공식 복무기록(DD214)에는 1953년 입대 이후 1980년대 초반까지의 군 복무 경력과 레이더 전문교육, 주요 훈장 및 표창 내역 등이 담겨 있다.
1935년 1월 9일 미국 뉴욕주 슬리피할로에서 태어난 마고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진로를 고민했다.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는 저를 대학에 보낼 돈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학비가 없었어요. 그래서 해군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1953년 10월 7일 뉴욕에서 미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2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가 제시한 공식 군 복무기록에도 최초 현역 입대일이 1953년 10월 7일로 기재돼 있다.
왜 군대에 들어갔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육군이나 공군이 아닌 해군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물을 좋아했다"며 웃었다.
당시 주변 친구들도 군에 입대했다. 누군가는 육군으로, 다른 친구는 공군으로 향했다. 마고타는 바다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약 30년에 걸친 군 생활의 출발점이 됐다.
신병훈련을 마친 그는 레이더 운용 및 정비 교육을 받았다. 미 해군이 발급한 1956년 복무기록에는 1954년 1월부터 7월까지 레이더 운용 및 정비 교육을 받은 사실이 명시돼 있다. 이후 레이더병으로 근무했으며 1956년 당시 계급은 레이더병 2급(RD2)이었다. 레이더병은 군함 주변에 접근하는 항공기와 선박을 탐지하고 위치와 이동 방향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는다.
"레이더가 빙글빙글 돌면서 주변의 배와 비행기를 찾아냅니다. 저는 화면을 보면서 접근하는 함정이나 항공기가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마고타가 승선했다고 밝힌 USS 볼티모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활동했던 중순양함이다.
1943년 취역한 볼티모어함은 마셜제도와 이오지마, 오키나와 작전 등에 참가했다. 길이 약 205m의 함정으로 8인치 주포 9문과 5인치 함포 12문 등을 갖췄다. 전쟁이 끝난 뒤 한 차례 퇴역했다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 11월 다시 취역했다.
마고타는 1954년 1월 처음 군함에 승선했다고 기억했다. 미국 동부 해안에서 출발해 파나마 운하를 지나 서부 해안과 하와이를 거쳐 일본으로 향했다고 했다. 이후 일본과 필리핀, 오키나와, 대만 등을 오가며 임무를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6개월 정도 해외에서 근무한 뒤 미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나가는 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군함 복무 경력 중 공식 서류로 확인되는 것은 USS 로체스터(CA-124)다. 1956년 작성된 복무기록에는 마지막 근무 함정으로 로체스터함이 기재돼 있다. 로체스터 역시 대형 함포를 장착한 미 해군 중순양함으로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작전을 수행한 군함이다.
마고타는 한국의 어느 해역에서 근무했느냐는 질문에 "서해였다. 중국 쪽 바다였다"고 답했다.
당시 한반도에서는 전투가 중단됐지만 평화체제는 수립되지 않았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3년 넘게 이어진 대규모 전투가 중단됐다. 육상에는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DMZ)가 설치됐다. 그러나 정전협정은 적대행위를 중단하기 위한 군사적 합의였을 뿐 전쟁을 정치적으로 종결하는 평화협정은 아니었다.
특히 서해는 정전 이후에도 군사적 긴장이 남아 있는 지역이었다. 정전협정은 백령도와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우도 등 서해 5개 도서군을 유엔군사령부의 군사통제 아래 두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육상의 군사분계선과 달리 서해 전체를 가로지르는 해상 군사분계선은 정전협정에 명시되지 않았다.
군사적 불신도 이어졌다. 유엔군사령부와 한국 정부는 북한 측의 정전협정 준수 여부와 군사장비 반입 등 정전협정 위반 가능성을 우려했다. 정전협정 이행을 감시하는 중립국감독위원회의 활동을 둘러싼 갈등도 계속됐다.
미 해군은 정전 이후에도 한국 주변 해역에서 경계작전을 수행했다. 미 해군 공식 함정사에 따르면 구축함 USS 몬센(DD-798)은 1954년 6월부터 약 4개월 동안 한국 근해와 대만해협을 순찰했다. 미 해군은 정전 이후에도 한반도 주변에서 해상 경계 임무를 이어갔다.
마고타의 하루는 레이더 화면을 지키는 일로 시작됐다.
"8시간씩 교대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오면 저는 식사를 하거나 쉬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다시 레이더 앞으로 돌아갔습니다."
군함 승조원들은 교대근무를 통해 24시간 감시체계를 유지했다. 레이더 화면에 나타나는 항공기와 선박의 위치를 파악하고 움직임을 추적했다.
긴박한 순간은 전투배치 명령이 내려질 때였다.
"함포를 발사해야 할 때는 '제너럴 쿼터스(General Quarters)'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해진 위치로 이동했습니다. 제 위치는 레이더실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직접 함포를 발사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목표를 찾아내면 사격통제 담당자들이 포를 발사했습니다. 저는 직접 포를 쏘지 않았습니다."
마고타는 한국 근해에서 북한 해안을 향한 함포 사격이 있었다고도 회고했다.
"항공기나 배를 공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안을 향해 포를 쐈습니다."
다만 포격이 이뤄진 정확한 날짜와 장소는 기억하지 못했다. 정전 이후 북한 해안에 대한 함포 사격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당시 작전기록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마고타는 한국 근해에서 복무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군함 안에서 보냈다고 했다. 레이더실이 그의 일터였기 때문이다.
"저는 배 안쪽에 있었습니다. 밖을 볼 수 없었어요. 텔레비전 화면을 보듯 레이더만 바라봤습니다."
한국군이나 북한군 병사를 직접 본 기억도 없다고 했다. 해안과 떨어진 바다에서 감시 임무를 수행한 데다 군함 내부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하는 한국 방문은 부산에서의 짧은 외출이었다.
"부산에 갔습니다. 사흘이나 나흘 정도 외출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습니다. 따뜻하고 손님을 잘 맞아줬어요."
한국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적이었느냐는 질문에도 사람들의 친절함을 꼽았다.
군함 생활은 고단했다. 몇 개월씩 바다에 머물러야 했고 잠자리는 좁았다. 음식도 단조로웠다.
"침대가 작았습니다. 음식도 별로 좋지 않았어요. 늘 비슷했습니다."
먼바다에서 작전할 때는 보급함이 접근해 식량과 물자를 전달했다. 그는 당시 해상 보급 장면을 담은 사진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가장 위험했던 순간을 묻자 마고타는 전투보다 태풍을 먼저 떠올렸다.
"태풍을 만났습니다. 바닷물이 배 안으로 들어왔어요. 배가 가라앉는 줄 알았습니다."
태풍을 만난 정확한 해역이나 시기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순간만큼은 여전히 선명했다.
"제가 오늘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행운입니다."
거대한 함포를 장착한 군함도 자연의 위력 앞에서는 안전하지 않았다. 바다에서의 군 생활은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임무뿐 아니라 거친 파도와 싸워야 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마고타의 군 복무기록에는 오랜 해군 복무 경력을 보여주는 훈장과 표창 기록도 남아 있다.
1956년 복무기록에는 선행근무훈장(Good Conduct Medal)과 중국지역 복무훈장(China Service Medal), 국방복무훈장(National Defense Service Medal), 지휘관 표창장(Commanding Officer's Letter of Commendation)이 기재돼 있다.
중국지역 복무훈장은 미 해군 등이 중국 및 인근 지정 해역에서 일정 기간 복무한 군인에게 수여한 훈장이다. 마고타가 인터뷰에서 일본과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을 오가며 복무했다고 설명한 것과 함께 주목되는 기록이다.
이후 해군 예비역 복무기록에는 해군 예비역 공로훈장(Naval Reserve Meritorious Service Medal), 국군 예비역 복무훈장(Armed Forces Reserve Medal), 해군 원정훈장(Navy Expeditionary Medal), 해상복무 약장(Sea Service Ribbon) 등이 추가로 나타난다.
특히 1980년대 초반 복무기록에는 해군 작전 전문요원(Operations Specialist)과 교관(Instructor) 경력이 기재돼 있다. 레이더 감시병으로 군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관련 기술과 작전 경험을 다른 군인들에게 가르치는 역할까지 맡았다.
마고타는 1957년 9월 19일 첫 현역 복무를 마치고 해군 예비역으로 전환됐다. 당시 전역은 명예전역(Honorable Discharge)으로 기록됐다.
이후 제대군인 교육지원제도인 'GI 빌(GI Bill)'을 이용해 대학에 진학했다. 학비가 없어 해군에 들어갔던 청년이 군 복무를 통해 대학 교육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대학을 마친 뒤에는 배터리 제조업체인 말로리 배터리 회사에서 품질관리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결혼을 전후해 직장을 잃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그는 다시 해군으로 돌아갔다.
"결혼했는데 직장이 없었습니다. 아이 셋이 3년 사이에 태어났어요. 해군에 들어가면 의료보험 등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그는 현역과 예비역 복무를 합쳐 약 30년간 군 생활을 했다고 설명했다.
공식 기록에도 장기간의 군 복무 경력이 나타난다. 1977년에는 버지니아주 노퍽의 해군 항공기술훈련센터에서 근무한 뒤 뉴욕주 미들타운의 해군 예비역 시설로 전환된 기록이 있다. 1982년 작성된 또 다른 전역 서류에는 버지니아비치의 해군 함대전투훈련센터(Fleet Combat Training Center) 소속으로 작전 전문요원과 교관 임무를 수행한 사실이 기재돼 있다.
한국전쟁 정전 직후 해군에 입대한 18세 청년은 어느덧 91세가 됐다. 70여년 전 군함의 레이더 화면을 지키던 기억은 여전히 그의 삶에 남아 있다. 당시의 정확한 작전 날짜와 해역은 희미해졌지만 거친 파도와 긴박했던 군함 생활, 그리고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친절함은 잊지 않았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