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 둘 중 택하라" AI 전쟁에… 동남아 균형외교 시험대
팍스 실리카 vs WAICO
美, 반도체·핵심광물 공급망 구축
싱가포르·필리핀 등 파트너십 합류
中, 저비용 인프라 패키지 내세워
말레이시아·인니·베트남 등 가입
동남아 진출 기업도 ‘이중고’
AI 공급망 양자택일 요구 땐
고객사 유지위해 생산라인 쪼개야
인프라 이원화 등 ‘고비용 리스크’
‘中공장 잔혹사’ 되풀이 우려 커져
【파이낸셜뉴스 하노이(베트남)=김준석 특파원】 안보와 경제 분야 곳곳에서 치열한 패권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이번에는 동남아시아 지역 인공지능(AI) 전선으로 격전의 무대를 옮기고 있다. 동남아 국가들은 각 분야에서 그동안 미·중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이어가며 균형 외교를 고수왔지만 이제는 AI 기술 마저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선택의 벼랑'에 몰리고 있다.
미국 주도의 AI 안보 협력체 '팍스 실리카(Pax Silica)'와 중국이 맞불을 놓은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WAICO)'가 동남아에서 격돌하고 있다. 데이터센터, 반도체 공급망, 오픈소스 AI 생태계가 단순한 상업적 도구를 넘어 국가 안보와 직결되면서 동남아 국가들의 '전략적 모호성'이 AI 영역에서도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다.
3일 닛케이아시아를 비롯한 외신들은 '팍스 실리카'와 WAICO가 동남아를 대분열로 몰아넣고 있다고 진단했다.
아세안 내 AI 노선은 이미 양분된 상태다. 싱가포르와 필리핀은 미국의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심 공급망 통제 전략에 발맞춰 팍스 실리카 진영에 합류했다. 반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은 중국 주도의 WAICO를 통해 저비용 인프라와 오픈소스 AI를 수용하는 실리 중심의 선택을 하고 있다.
문제는 미국이 자국 중심의 공급망 참여국들에게 중국 주도 체제와의 동시 참여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압박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미국의 '팍스 실리카' 동맹에 가입한 싱가포르는 중국의 'WAICO' 초청을 두고 고심하던 중, 미국 정부로부터 "양다리는 불가능하다"는 최후통첩성 경고를 받기도 했다.
AI 공급망이 분리되어 상호 배타적인 선택을 요구받으면서 동남아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은 이중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특히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주요 기업들이 동남아 지역에서의 반도체 생산 체제 구축을 본격화하는 초읽기 단계에 나선 상황에서, 미·중 기술 갈등에 따른 이른바 '샌드위치 리스크'를 두고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칩 통제의 '팍스 실리카' vs 규범 장악의 'WAICO'
미국 국무부가 주도하는 팍스 실리카는 철저히 반도체·핵심 광물 등 '하드웨어 물리 공급망'의 블록화에 초점을 맞춘다. 반도체의 핵심 원료인 실리콘에서 이름을 딴 만큼, 한국·일본·대만 등 첨단 제조 강국을 묶어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을 통제하고 미국 중심의 독점적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핵심이다. 거대 자금력을 바탕으로 '팍스 실리카 펀드'까지 출범시키며 우방국을 포섭하는 한편, 동시 가입을 불허하는 배타적 노선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중국이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맞불을 놓은 'WAICO'는 글로벌 사우스를 겨냥한 '소프트웨어 및 AI 거버넌스 규범 장악'을 노린다. 미국의 첨단 반도체 통제를 우회하기 위해 저비용 인프라 패키지와 오픈소스 AI 모델을 개도국 생태계에 유연하게 이식하는 전략이다. 국제 AI 알고리즘 거버넌스와 표준 제정의 주도권을 쥐어 장기적으로 중국 중심의 기술 록인(Lock-in·) 효과를 보겠다는 구상이다.
동남아 역내 리더들은 이러한 강대국의 이분법적 강요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9월 10일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GZERO 서밋 아시아' 콘퍼런스에 참석한 마리 판게스투 인도네시아 특사는 미국의 배타적 공급망 전략을 겨냥해 "최근 팍스 실리카 측에서 '우리 체제에 참여하면 다른 진영(중국 WAICO)에는 가입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고 지적하며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러한 양자택일의 상황에 내몰려서는 안 된다"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같은 무대에 선 찬 헹 치 싱가포르 무대사(Ambassador-at-Large·부임지가 없는 대사) 역시 "실질적인 압박의 대부분은 미국으로부터 오고 있다"고 인정하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많은 신흥국이 미·중 어느 한쪽에 완전히 종속되지 않는 '제3의 공간'을 원하고 있지만 AI 분야에서 가해지는 압박이 거대하다고 토로했다.
■삼성·SK하이닉스 '中공장 잔혹사' 동남아서 재현되나
이러한 미·중의 전방위적 진영 가르기는 아세안 공동체의 통합 근간마저 흔들고 있다. 아세안 10개국이 공동의 디지털 규범을 수립해 서명하려던 '아세안 디지털 경제 프레임워크 협정(DEFA)'은 역내 국가들이 미국계와 중국계 기술 생태계로 파편화되면서 사실상 동력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했다. 기술 진영이 쪼개지면 역내 데이터의 자유로운 이동이나 공동 투자가 막히기 때문이다.
동남아 현장에 진출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반도체 부품사들 또한 양쪽 진영의 고객사를 모두 잃지 않기 위해 생산 라인을 강제로 쪼개야 하는 천문학적 고비용 리스크에 직면했다. 동남아 지역에서 반도체 부품을 생산 중인 한 일본계 기업 관계자는 닛케이아시아에 "AI 공급망이 이대로 완전히 분리되어 상호 배타적인 선택을 요구받는다면 막대한 인프라 이원화 비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하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동남아 지역에서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 중인 K반도체에도 미·중 양극화는 악재가 될 전망이다. 최근 후공정 허브를 베트남 타이응우옌성에 구축 중인 삼성전자 외에도 베트남의 하나마이크론을 비롯해 필리핀의 SFA반도체, 말레이시아의 해성디에스 등이 동남아에서 생산 기지를 운영 중이다.
업계에서는 과거 '중국 공장 잔혹사'를 연상시킨다는 반응이 나온다. 미국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내 생산기지를 대상으로 가했던 첨단 반도체 장비 반입 규제와 수출 통제 리스크가 이제는 동남아에서 고스란히 재현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직접적인 상호 규제 움직임은 없는 상황이나 진출 기업들은 예의주시 중인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미·중 기술 갈등이 동남아 현지 생태계마저 두 동강 내고 있어 곤혹스럽다"며 "미국과 중국 양측의 공급망 요구를 모두 충족하려면 현지 생산 시설과 협력업체 라인을 완전히 이원화하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염두에 두고 셈법을 다시 짜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