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에 끌려간 18세 소년, 국군 거쳐 美 ABC 기자로<1950 산 자들의 기억⑧>
인민군 의용군에 끌려갔다 탈출, 국군 1사단 수색대로 참전
문산 고지 전투서 한쪽 눈 잃어…전쟁 후 뉴욕서 언론인 활동
참전용사 단체 창립 당시 176명, 이제 생존자 8명뿐
【파이낸셜뉴스 뉴욕=이병철 특파원】 "처음 전투에 나갔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어요. 총알은 보이지도 않는데 사방에서 날아왔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두려움마저 없어지더군요. 배고프고 지치고, 죽으면 죽는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한국전쟁 참전용사 강석희 회장(94)의 기억 속에 1951년 봄의 전장은 여전히 생생하다. 당시 19세였던 그는 국군 제1사단 수색대원으로 최전선에서 싸웠다. 얼어붙은 땅을 파서 잠자리를 만들고 돌덩이처럼 굳은 찬밥으로 허기를 달래야 했다.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과 포탄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나 끝내 죽음은 그를 비켜 가지 않았다. 1951년 5월 경기도 문산 인근 고지를 공격하던 중 폭발에 휘말렸다. 눈앞에서 햇빛보다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고 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가 밀려왔다. 귀가 찢어지고 한쪽 눈을 크게 다쳤다. 충격으로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면서 다리까지 부러졌다. 정신을 잃은 그가 다시 눈을 뜬 곳은 병원이었다. 고향에는 이미 그가 전사했다는 소문까지 퍼져 있었다.
최근 미국 뉴욕에서 만난 강 회장은 75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정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4년 뉴욕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단체를 창립한 인물이다. 당시 176명이었던 회원 가운데 이제 생존자는 8명에 불과하다. 강 회장이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전쟁의 기억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이유다.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강 회장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서대문구 창천동에 살던 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당시 중학교는 6년제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됐고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미처 피란길에 오르지 못한 강 회장은 북한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약 3개월을 보냈다.
운명을 바꾼 사건은 먹을 쌀을 구하러 나갔다가 벌어졌다. 길거리에서 북한군에 붙잡혀 의용군으로 끌려간 것이다.
"먹을 게 없으니까 쌀을 구하러 다녔어요. 그런데 길에서 붙잡혔죠. 가족들에게 알릴 틈도 없었어요."
북한군은 그를 비롯한 학생들을 안양까지 끌고 갔다. 전쟁터로 보내질 처지였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미군 전투기가 나타나 폭격을 시작한 것이다.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하는 바람에 우리를 끌고 가던 사람들이 정신이 없었어요. 그때 학생들이 도망칠 기회가 생겼죠. 나도 그 틈을 타서 탈출했어요."
목숨을 건 탈출이었다. 붙잡히면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숨긴 채 시간을 보냈고 서울이 국군에 수복된 뒤에야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전선은 다시 남쪽으로 밀려 내려왔다. 강 회장도 더 이상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갈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그는 대구에서 군에 입대했다. 당시 18세였다.
"그때는 먹을 것도 없고 나라가 전쟁 중이었잖아요. 제2국민병역이라고 해서 일정 나이가 되면 다 가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가 배치된 곳은 국군 제1사단 수색대였다. 전투 경험은커녕 총조차 제대로 다뤄본 적 없는 소년이었다.
군사훈련 기간은 불과 20일이었다. 총기 분해와 청소, 기본 동작 등을 배웠다. 당시 지급받은 M1 소총은 어린 병사에게 버거운 무기였다.
"M1 소총을 한 발 쏘면 어깨가 무척 아팠어요. 총이 크고 무거웠죠."
이후 수색대에 배치되면서 무기는 M1 카빈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총이 조금 가벼워졌다고 전쟁의 무게까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1950년 12월 전방에 배치된 강 회장은 이듬해 1월부터 본격적인 전투에 투입됐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강 회장이 처음 전투에 나선 곳은 수원 일대였다.
수색대의 임무는 일반 보병과 달랐다. 부대의 가장 앞에서 이동하며 적의 위치와 움직임을 확인하고, 본대가 진격할 수 있도록 길을 여는 역할이었다. 적과 가장 먼저 마주칠 수밖에 없는 위험한 임무였다.
"우리는 수색대니까 항상 제일 앞에 나갔어요. 목표가 정해지면 먼저 들어가서 적이 있는지 살펴야 했죠. 무전기로 본부와 연락하면서 움직였어요."
당시 병사들의 생활은 전투만큼이나 혹독했다. 한겨울에도 제대로 된 막사나 숙소가 없었다. 땅을 파서 만든 참호가 곧 집이었다.
"겨울인데 땅을 파야 해요. 그게 우리 집이었어요. 참호를 파서 거기 들어가 자는 거죠. 밥을 끓여 먹을 수도 없으니까 찬밥을 먹었는데 돌덩어리처럼 딱딱했어요."
일본에서 공급된 전투식량에는 미숫가루와 담배, 건빵 등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되면 끼니를 챙기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처음에는 참호 밖으로 얼굴을 내밀기가 어려웠어요. 총알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니까요. 총알이 보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전투가 거듭되면서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다.
"나중에는 그것도 내성이 생겨요. 공포심이 없어지는 거죠. 배고프고 피곤하고, 죽으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 회장은 어린 나이에 죽음을 앞두고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어머니였다고 했다.
"전쟁터에 나가니까 지난날 잘못했던 일들이 생각났어요. 어머니에게 반항했던 것도 생각나고, 내가 불효를 했구나 싶었죠. 살아서 돌아가면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효도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51년 초 국군과 유엔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강 회장이 속한 부대도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수원에서 출발한 부대는 한강을 건너 서울로 진입했다. 강 회장은 당시 한강 도하 작전에서 수색대가 먼저 강을 건너 적의 동태를 살폈다고 회상했다.
"우리가 먼저 건너가야 하잖아요. 적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통신병은 무거운 배터리를 메고 다녔고 우리는 작은 무전기를 가지고 움직였어요."
서울을 지나면서 전투는 다시 치열해졌다. 문산 일대에서는 미군 공수부대와 협동작전도 벌였다.
강 회장은 당시 낙하산을 이용해 추위를 견디던 기억도 떠올렸다.
"미군 낙하산이 떨어지면 그걸 찢어서 목에도 두르고 그랬어요. 푹신푹신하고 따뜻했거든요. 낙하산에 붙어 있던 전투식량도 먹었죠."
부대는 문산을 지나 장단과 임진강 일대까지 진격했다. 강 회장은 임진강을 건너 개성 인근에서 약 한 달 동안 머물며 정찰작전을 수행했다고 했다.
그러나 1951년 4월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강 회장이 있던 곳은 임진강 인근 고랑포 일대였다.
"밤에 나가 있는데 이상했어요. 적 부대가 많이 움직이는 게 보였죠. 그런데 보니까 까맣게 내려오는 거예요."
중국군이 대규모로 남하하고 있었다. 수색대는 후퇴해야 했다.
문제는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도 목숨을 위협받았다는 점이다. 강 회장은 당시 아군 항공기가 수색대를 적군으로 오인해 공격했던 일도 기억했다.
"우리가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비행기가 우리 쪽을 공격했어요. 돌아갈 배까지 공격을 받았죠. 수색대는 계급장도 제대로 달지 않고 다녔으니까 적군으로 오인한 거예요."
그는 본부에 연락해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공격을 중단시켜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군의 공세에 밀린 부대는 서울 수색 일대까지 후퇴했다. 이후 다시 반격이 시작됐다.
강 회장은 당시 미군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북쪽으로 진격하던 광경을 기억했다.
"서울 중앙청 앞에도 큰 포들이 있었어요. 155㎜ 포가 쏘아지면 포탄이 우리 머리 위로 날아갔죠. 나무가 부러지고 주변이 온통 부서졌어요."
전선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밀고 밀리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리고 1951년 5월, 강 회장의 운명을 바꾼 전투가 벌어졌다.
문산 인근의 한 고지였다. 강 회장이 속한 수색대는 미군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아 적이 점령한 고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상황은 불리했다. 중국군은 높은 지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국군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야 했다. 나무도 많지 않아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았다.
"적은 고지에 숨어 있고 우리는 밑에서 올라가는 거예요. 숨을 데가 없었어요. 기관총이 계속 쏟아지니까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죠."
적진 가까이 접근하면 수류탄까지 날아왔다. 강 회장은 후방에 지원을 요청했고 미군 전차가 직사포를 발사하며 공격을 도왔다.
"전차에서 포를 쏘면 꽝꽝 소리가 났어요. 그걸 지원받으면서 올라갔죠."
하지만 고지에 접근할수록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적의 기관총 사격과 수류탄 공격이 이어졌다. 강 회장도 수류탄을 던지며 싸웠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눈앞에서 번쩍하는 거예요. 햇빛보다 더 밝았어요. 냄새도 아주 고약했죠."
폭발 충격으로 귀가 찢어지고 한쪽 눈을 크게 다쳤다. 몸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 다리까지 부러졌다.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터졌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예요."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서대문 인근의 병원이었다. 이후 영등포 일대의 군 의료시설을 거쳐 대구의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깨어나 보니까 온몸이 피투성이였어요. 여기저기 치료한 흔적이 있었죠."
부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고향에는 그가 죽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났었어요. 그런데 살아난 거죠."
강 회장은 여러 차례 치료와 수술을 받았다. 한쪽 눈을 잃었고 몸에는 전쟁의 상처가 남았다. 그는 지금도 당시 다친 귀를 만지면 상처가 느껴진다고 했다.
결국 1951년 겨울 군에서 제대했다. 당시 계급은 일등병이었지만 제대하면서 한 계급 특진해 하사가 됐다.
전쟁터에서는 살아남았지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강 회장이 제대한 뒤 머문 곳은 부산의 상이군인 정양원이었다. 전쟁에서 팔다리를 잃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한 군인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서울의 집은 이미 전쟁으로 불타 없어졌다.
"집이 없었어요. 나중에 가보니까 부모님하고 동생은 방공호에서 살고 있었어요.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진 거죠."
그는 정양원에서 다른 상이군인들을 돕는 일을 맡았다. 총무과장 역할을 하며 미군으로부터 구호물자를 구해오는 일도 했다.
당시 상이군인들의 삶은 비참했다. 팔다리를 잃은 군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 했다. 강 회장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전쟁 이후에도 또 다른 고통을 겪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1953년 서울로 올라온 강 회장은 미군이 운영하던 유엔군사령부 방송 관련 업무에 참여하게 됐다.
당시 유엔군은 북한을 상대로 심리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북 방송을 송출하고 전단을 살포하는 등의 활동이었다.
"유엔 방송이라고 있었어요. 대북 방송을 하고 심리작전을 하는 곳이었죠. 비행기로 전단을 뿌리기도 하고 바다로 흘려보내기도 했어요."
강 회장은 이곳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약 13년 동안 근무했다.
이후 베트남전쟁이 벌어지자 미국 회사에 취업해 베트남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항공 우편물과 전사자 시신 등의 운송 업무를 맡았다.
"위험한 일이었죠. 하지만 사람이 필요했고 용기가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베트남에서 그의 인생을 다시 바꾼 인연이 시작됐다. 미국 ABC방송 관계자들과 만나면서 언론계와 연결된 것이다.
1973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강 회장은 ABC방송에서 일하게 됐다. 이후 NBC와도 인연을 맺으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당시 사용했던 취재증과 여러 현장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한국전쟁에서 살아남은 소년병이 미국에서 언론인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다.
강 회장은 2004년 뉴욕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 단체를 창립했다.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인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서로의 삶을 돌볼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립 당시 회원은 176명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회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2004년에 처음 만들었을 때 176명이었어요. 그런데 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여덟 명 남았어요."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강 회장이 참전용사들의 기억을 기록하고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일에 힘을 쏟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다 돌아오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처음에는 동료들이 죽으면 미안했어요. 그래서 지금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
그는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단순한 행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죽은 전우들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살아남은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내 생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하지만 동료들의 명예와 우리의 존엄은 지켜야 해요."
강 회장은 특히 젊은 세대가 전쟁을 단순히 교과서 속 역사로만 받아들이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나도 젊었을 때는 임진왜란 같은 역사를 배워도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6·25를 직접 겪고 나니까 전쟁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알게 됐어요."
그는 전쟁이 결코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역사는 다시 반복될 수 있어요. 그래서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해요. 전쟁을 없애야 한다는 걸 알려야죠."
그가 20년 넘게 참전용사 단체를 이끌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강 회장은 자신이 쓴 글과 오래된 사진들을 다시 꺼냈다. 전쟁 당시의 기록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남긴 자료들이었다.
그에게 한국전쟁은 단순히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벌어진 전쟁이 아니다. 18세 소년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이자 75년이 지난 지금도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기억이다.
전쟁터에서 죽음을 앞두고 어머니를 떠올렸던 소년은 어느덧 아흔을 넘긴 노인이 됐다. 함께 총을 들었던 동료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강 회장은 자신을 정치적 이념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좌도 우도 아니에요. 나는 애국자예요. 내 나름대로 신념을 가지고 살아왔어요."
그에게 애국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들을 기억하고, 살아남은 참전용사들의 존엄을 지키고,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후세대에 전하는 일이다.
강 회장은 마지막으로 전쟁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을 경계했다.
"우리가 직접 겪어보니까 전쟁이 얼마나 가혹한지 알아요. 사람들에게 그걸 알려야 해요. 전쟁이 다시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email protected] 이병철 특파원




